‘저는 당신이 밀어주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걷기 위해 세상에 나왔답니다. 평탄한 길은 저를 의지하고 오르막길은 조금 힘주어, 내리막길은 꼭 잡아당기며 함께 걸어주세요.’ 지체장애2급 정종민(43) 시인의 작품 ‘휠체어’의 한 대목이다. 정지영(37) 작가와 김태훈(33) 박용호(33)씨는 시가 노래하듯 휠체어와 함께 걷기 위해 3년 동안 서울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 땀의 결실이 이달 초에 펴낸 책 ‘오늘 이 길, 맑음’이다.
서울 서초구 신반포교회(홍문수 목사)에서 17일 세 사람을 만났다. 정 작가는 “적어도 장애인 편의 정보가 없어서 외출을 두려워하는 장애인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5년 전 사진 촬영으로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 목사)에 재능을 기부하던 정 작가가 김씨, 박씨와 함께 ‘특별한 소풍’이라는 장애 체험에 참여한 게 시작이었다. 박씨는 안대를 쓰고, 김씨가 탄 휠체어를 밀었다. 정 작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보행약자로서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을 밀알복지재단 소식지에 실었다.
“평소엔 쉽게 드나들던 곳들도 번번이 출입이 막혔어요. 이동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자신에게 불편을 주는 존재가 등장한 것처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어요.”(김태훈)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이었어요. 태훈이가 아무리 주변 상황을 설명해줘도 머릿속에 그림은 그려지지 않고 계속 무언가에 부딪힐 것만 같았죠.”(박용호)
세 사람의 아름다운 여정에 그림자처럼 동행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지금의 아내와 여자 친구들이다. 이 여섯 사람은 ‘특별한 소풍’을 떠나기 전부터 신반포교회 청년부 안에서 ‘램프’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섬김과 나눔을 펼쳐왔다.
2013년부터는 서울 시내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특별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장애인들에게 엘리베이터와 화장실, 평평한 길을 새로 만들어줄 순 없지만 이미 만들어진 곳들을 안내하는 지도는 선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세 청년의 열정이 밀알이 돼 ‘특별한 지도 그리기’는 3년 동안 이어졌다. 그 사이 대학생과 직장인 등 16명의 자원봉사자(서포터즈)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장애인의 시각에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비장애인 한 명이 휠체어를 타고 다녔고 나중에는 청년 장애인이 지도 그리기에 직접 힘을 보탰다.
정 작가는 “지하철역 내 엘리베이터와 장애인 화장실 위치, 장애인의 통행을 배려한 길, 장애인이 가기 쉬운 문화시설과 식당들이 하나씩 지도에 표시될 때마다 길 위의 콜럼버스가 된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세 청년과 서포터즈들은 서울의 한복판인 시청역과 종각역, 광화문역부터 올림픽공원역, 압구정역, 서울숲역까지 총 26개 역과 주변 118곳의 명소들을 방문했다. 그 발자취와 장애인 편의 정보들을 모은 게 이번에 펴낸 책이다. 책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지하철 여행기’라는 부제가 달렸다.
여행안내서는 많지만 이 책은 지역 명소들의 정보와 지도, 작가의 현장 묘사까지 오롯이 장애인의 시각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렸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하다.
정 작가는 “보행약자들이 맑고 밝은 마음으로 길 위를 오갈 수 있길 바란다는 뜻에서 책 이름을 ‘오늘 이 길, 맑음’으로 지었다”면서 “장애인들을 위한 단순한 정보집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의 삶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크리스천이었기에 세상의 불공평함에 분노하며 비판만 하지 않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선한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박씨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가진 선함이, 럭비공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열정을 하나의 실천으로 모아줬다”고 맞장구를 쳤다.
책의 인세는 차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장애인식 개선사업에 전액 사용된다. 책의 내용을 보강하기 위해 선발된 3기 서포터즈도 23일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김미란 밀알복지재단 홍보팀 대리는 “3기 서포터즈는 더 넓은 지역을 조사하고 보행약자의 이동편의를 위한 더 세부적인 정보를 수집한다”면서 “많은 장애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어플리케이션도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장애인, 교회를 가다] “보행 약자들 세상 나들이 돕는 책 만들었어요”
입력 2016-04-19 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