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게 펼쳐진 땅 위의 녹색 바다 전북 고창 청보리밭

입력 2016-04-20 19:47 수정 2016-04-20 19:55
전북 고창의 학원농장 청보리밭을 찾은 연인이 초록 물결로 일렁이는 보리밭 사잇길을 다정하게 걷고 있다.
청보리밭 옆 노란 유채꽃밭과 원두막
‘스르륵∼ 스르륵∼.’

전북 고창에서 햇살을 마음껏 품은 알곡을 키워내는 보리밭은 푸른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초록빛 들녘에 싱그러운 봄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녹색 빛을 가득 안고 파도처럼 춤을 추는 보리는 바람소리를 연주해낸다. 웅장한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킨다.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자연의 하모니를 듣는 여행객은 희망을 품는다.

보리는 가을이 끝나갈 무렵인 10월 말쯤 파종해 6월 초 수확하는 대표적인 겨울작물이다. 수확을 한 달 남짓 앞둔 4월말에 푸르름의 절정을 달리며 가장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 푸른 오늘을 얻은 것이다.

보리는 나이 지긋한 이들에 아련한 회상을 불러일으킨다. 극도로 궁핍했던 시기에는 기나긴 보릿고개를 떠올리게 한다. 쌀독은 바닥나고 보리 수확은 이른 시기, 풀뿌리 캐고 나무껍질 벗겨 죽을 쒀 먹어야 했다. 봄 먹을 게 귀하던 시절 채 여물지 않은 보리이삭을 베어 삶아먹고 구워먹던 굶주린 계절에 보리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먹을거리가 풍족해지고, 식생활의 변화와 보리쌀 감산정책 등으로 보리밭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관광객들을 위한 보리밭은 광활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에게 보리밭은 놀이터였다. 이삭이 팬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추수가 끝나고 쌓인 보릿짚 무더기에서 뒹굴기도 했다.

보리가 뿜어내는 신록은 5월 초까지 이어진다. 수확이 가까워지는 5월 중순이 지나면 보리는 누렇게 익어 황금빛 물결을 뿜어낸다. 6월이 되면 본격적인 수확의 계절이 온다. 보리가 결실을 본 그 자리는 거대한 해바라기밭으로 변신한다. 10월 초에는 하얀 메밀꽃이 그 자리를 메운다. 가을이 오면 소금을 뿌린 듯 메밀꽃이 천지간에 가득할 것이다.

고창군 공음면 학원관광농장에 우뚝 선 풍차 전망대에 오른다. 100㏊에 이르는 넓은 보리밭이 곧고 푸른 자태를 자랑하며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하늘 향해 뻗은 보리가 초록의 향연을 수놓고 있다. 보리밭에는 작은 오솔길이 이어져 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적당한 폭이다. 그 길을 함께 걷는 연인도,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도 그림 같은 풍경을 더한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유채꽃 대신 한적한 길을 택해 천천히 걷는다. 발밑의 황톳길이 부드럽다. 양옆에서 보리가 끊임없이 뿜어내는 녹색 물감이 마음에 그대로 채색되는 듯하다. 세상의 스트레스도 모두 덧씌워진다. 보리밭 옆 유채꽃밭에서 스며드는 꽃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굳이 가곡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을 부르지 않아도 입에서, 마음에서 흥얼거림이 저절로 나온다. 앞서 가던 연인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거나 함께 셀카를 찍으며 소중한 추억을 수확한다. 때로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멀리 아이를 안고 가는 아빠는 아이에게 잊지 못할 유년기를 만들어주기에 여념이 없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 지 ‘까르르’ 웃는 모습에서 행복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소문 듣고 찾아온 사진작가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추억에 사로잡혀 보리밭을 걷다보면 아득해 보이던 노송이 눈앞에 다가선다.

보리밭 한 쪽에 펼쳐진 샛노란 유채꽃밭이 봄의 서정을 더한다. 초록과 노랑이 어울려 빚어내는 봄빛이 눈부시도록 화사하다. 푸르름에 물든 마음에 노란 꽃이 수를 놓는 듯하다. 그 사이 앙증맞게 자리한 원두막도 운치 있다.

지난 16일부터 5월8일까지 이곳에서 고창청보리밭축제위원회가 주관하는 제13회 청보리밭 축제가 ‘한국인의 본향 고창! 초록물결 청보리밭!’이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다. 축제는 옛 정취를 간직한 채 향수와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아련한 감동을 전한다. 이번 축제는 보리밭 사이사이 이야기가 있는 테마길을 마련해 방문객들이 직접 이야기를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했다. 각종 공연과 전통놀이, 체험 행사도 다채롭게 마련됐다.

축제를 즐기고 난 뒤 모양성(고창읍성)도 찾아보자. 산 중턱을 타고 동그랗게 둘러친 1680m의 성벽 위로 길이 나 있어 누구든 원하면 걸을 수 있다. 성 안팎으로 들과 숲이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다. 샛길로 빠져 성안으로 들어서면 복원한 객사와 관아가 옛 모습을 일깨워준다. 주변에 하늘을 찌를 듯, 세상을 덮을 울창하게 자리잡은 대나무숲과 소나무숲이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고창=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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