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의 ‘슬로시티 청산도를 제대로 여행하는 방법’에서 첫 번째로 제안한 문구를 최근 종영한 인기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말투로 표현한 것이다. 전남 신안의 증도, 담양의 창평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느림의 섬’ 청산도에서는 서두르지 말고 ‘슬로길’을 천천히 걸으며 여유를 누려보라는 조언이다.
청산도 슬로길은 11개 코스에 42.195㎞(100리)에 달한다. 마라톤 풀코스에 해당하는 긴 거리다. 전체 코스를 다 돌아보면 좋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 조급함이 앞장선다. 모두 가보지는 못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찬찬히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길은 이정표와 지렁이처럼 꼬물거리는 파란색 화살표가 안내해준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청산도 도청항에 내리면 곧바로 1코스가 시작된다. 대부분 여행객은 항구 인근에 주차된 투어버스 등에 몸을 싣고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 ‘여인의 향기’ 촬영지로 향한다. 하지만 걸어보자. 서편제 촬영지까지 약 1.9㎞ 밖에 안되는 도로 옆으로 데크가 깔려 있어 안전한 데다 유채꽃과 어우러진 항구, 바다의 풍경이 처음으로 반겨주는 감동이 적지 않다.
촬영지에 도착하면 오른편으로 바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도락 마을이고, 왼편은 당리와 읍리 마을이다. 정겨운 돌담 너머 하늘거리는 유채꽃, 그 뒤로 이어지는 푸른 바다와 보석처럼 점점이 반짝이는 섬…. 청보리와 마늘밭이 수놓는 푸른 빛깔도 더해진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광이다. ‘서편제길’에 들어서기 전에 반대편 성곽으로 올라서면 영화의 명장면이 따로 없다. 주인공이 진도아리랑 가락에 실어 애절한 한을 토해냈던 곳이 한눈에 보인다. 5분 넘게 고정된 화면 속에 우리의 눈과 귀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았던 그 황톳길이다. 그 길을 걷는 여행객들의 발걸음도 저절로 느려지는 듯하다.
세트장인 ‘언덕 위의 하얀집’을 지나면 슬로길 1코스가 이어진다. 청산도 주민들에게는 화랑포(花浪浦)길이다. 파도 물결 뒤집히는 모습이 ‘꽃이 피는’ 것처럼 보여 지어진 이름이다. 언덕 아래 푸른 바다 위에 부서지는 눈부신 햇살이 영락없다.
이어서 2코스 ‘사랑길’로 이어진다. 길 이름은 한쪽에 자리 잡은 ‘연애바위’에서 따왔다. 해안 벼랑을 따라 휘어져 가는 험난한 이 바위 구간을 지날 때 남성이 여성의 손을 잡아주면서 사랑을 싹틔워 그렇게 불렀단다. 연애바위 안전 울타리에 매달린 사랑의 자물쇠도 애틋하다. 저마다 수줍은 고백을 안고 있다.
3코스를 질러가면 4코스 ‘낭길’로 연결된다. 구장리에서 권덕리까지 이어지는 낭떠러지 길 1.8㎞로 40분 정도 소요된다. 바다와 섬의 경계를 따라 걸으면 하늘에 떠 있는 듯, 바다에 떠 있는 듯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쉼 없이 달려온 일상에 잠시나마 느림의 여유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슬로길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옛날 섬사람들이 오가던 길을 살려 끊어진 곳만 연결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 길을 따라 마을을 오가고, 다른 이는 물질하러 다니던 길이다.
5코스 ‘범바위길’은 권덕리에서 범바위까지 이르는 길로 청산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지름길로 바로 오르지 말고 말탄바위를 지나면 더 좋다. 바로 아래 수직으로 떨어지는 해식절벽과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푸른 바다가 환상적이다. 말탄바위에서 느림을 대표하는 거북이 가족을 찾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왼쪽으로 엄마 거북을 찾아가는 아기 거북, 오른쪽으로 아빠 거북 모양의 땅이 뚜렷하다.
여기서 안부에 내린 뒤 다시 오르면 범바위다. 옛날 청산도에 들어와 살고 있던 호랑이가 권덕리 고개에서 바위를 향해 포효하니 이 바위가 크게 울려 호랑이는 자기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있는 줄 알고 도망쳐서 범바위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다소 가파르지만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광이 발품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속세의 티끌을 다 날려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전남 여수시에 속하는 거문도,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범바위에는 자철석 성분이 많아 강력한 자기장이 발생하며 가까운 곳에서는 나침반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때문에 권덕리 앞바다에 배들의 사고가 잦았다고 한다. 해도에도 자기장 이상지역으로 표시되는 ‘한국판 버뮤다 삼각지’다. 범바위 앞에서는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거나 배터리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6코스에서는 청산도에만 있는 구들장논이 여행객을 맞는다. 산비탈을 파내 맨 아래에 돌을 깔아 구들장 형태의 수로를 만들고, 그 위에 모래 진흙을 5∼6회 다져 방수작업을 한 뒤 또 그 위에 벼가 뿌리내릴 흙을 채운 논이다. 주민의 땀과 지혜로 느리게 일궈낸 눈물겹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문화인류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에서 최초로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낙조가 특히 아름답다는 청산도의 대표적 해수욕장인 지리해수욕장도 빼놓을 수 없다. 슬로길 10코스 ‘노을길’에 속하는 이 해수욕장에는 백사장 1.2㎞를 따라 수령 200년을 넘긴 해송 8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싸 운치를 더해준다. 여기서 10여분을 더 가면 다시 도청항에 도착한다.
청산도에서 ‘느림은 행복이다’라는 주제로 오는 30일까지 ‘2016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가 열리고 있다. 올해 8회째인 축제는 슬로길 걷기, 슬로체험, 공연, 전시, 홍보 이벤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구성됐다.
신우철 완도군수는 “슬로시티 청산도를 방문해 슬로길을 천천히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면서 힐링족욕탕에서 피곤함을 풀고 범바위 기를 받아 소원 성취하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행메모
완도항에서 배로 50분… 전복을 통째 넣은 ‘장보고빵’ 별미
먼저 완도항을 찾아간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 종점까지 간 뒤 2번 국도를 따라 가다 해남에서 13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완도여객터미널(1666-0950)에서 청산도로 운항하는 카페리를 이용한다. 약 50분 걸린다. 운항 횟수는 주중과 주말이 다르다. 축제 기간에는 더 자주 운항한다.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느린섬여행학교(061-554-6962)에서는 체험과 함께 식사와 숙박을 할 수 있다. 슬로시티 청산도 홈페이지(slowcitycheongsando.co.kr)에서 더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청정바다수도’ 완도는 해산물의 보고(寶庫)다. ‘2016장보고수산물축제’가 5월 4일부터 8일까지 완도 해변공원과 장보고기념관 일원에서 개최된다. 시푸드관, 해조류 판매장, 특산품 판매관과 해조류 음식경연대회 등이 준비된다. 완도우성회센터에서는 신선하고 맛있는 갑오징어, 뿔소라 등 제철음식을 맛볼 수 있다.
완도에서 요즘 떠오르는 별미가 전복빵이다. ‘프라임 로스터스’ (061-552-0200)는 ‘장보고빵’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냈다. 싱싱한 완도산 전복 한 마리가 통째로 빵에 들어간다. 가격은 한 개에 4500원. 해조류로 만든 ‘시위드 음료’도 맛나다.
청산도(완도)=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