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성여중 학생이 됐다. 학년 전체에서 2등을 했고 부모님이 바라시던 대로 장학생이 돼 수업료를 내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그때도 아버지의 극장에 자주 갔다. 극장은 학교에서 인정하는 단체관람 때를 제외하곤 금지구역이었다. 친구들은 영사실에서 영화를 보는 나를 부러워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리(현 익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서울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 고등학교는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보내주세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여름방학 때 서울에 올라와 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난생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난 것이었지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서울에는 약대 졸업 후 약국에 취업한 큰언니와 대학에 다니는 작은언니가 한남동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1개월간 서울생활을 마치고 이리로 내려갔다가 입시를 앞두고 다시 올라왔다. 버스 안에서 여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이야기하는데 세련된 표준말이었다. ‘아, 이제 나도 서울사람이 되겠구나!’ 묘하게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언니와 함께 종로에 있는 경복학원을 찾아갔다. 재수생이 많았지만 나처럼 서울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학생도 많았다. 인생의 첫 번째 시련은 1971년 1월에 닥쳐왔다. 이화여고 입학시험을 쳤는데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낙심한 나를 보며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배숙아, 서울에서 고생하지 말고 다시 이리로 내려와서 남성여고에 진학하는 게 어떻겠니?”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까짓것 1년 재수하면 어떠냐. 나이도 어리고 학교도 1년 일찍 들어갔으니 다시 도전하면 입학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의 격려에 1개월간 쉬고 다시 경복학원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예과반에 들어갔지만 월말고사 성적이 좋게 나와 특수반으로 옮겼다.
한번은 학원에 가다가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간신히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원인은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큰언니는 이미 약국으로 출근했고 작은언니도 학교에 갔기 때문에 나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혼자 방에 누워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해 여름 청계천 고가 옆 아파트로 이사했다. 비록 연탄을 때야 하는 방 2개짜리 서민아파트였지만 언니들과 함께 사는 독채 전세여서 마냥 좋았다. 무척 만족스러웠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드디어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 왔다. 경기여고에 원서를 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합격했어요!” 아버지의 소원을 반쯤 이뤄드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국가에서 상을 받아 휘장을 몸에 걸치는 꿈을 꿨다”면서 내가 합격할 줄 알고 계셨다고 했다. 합격자 발표 후 1개월간의 여유가 있어 영어학원에 다녔다. 당시는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핑퐁외교를 앞세워 중국과 수교했을 때다. 헨리 키신저의 외교 역량에 세상이 감탄했고, 마오쩌둥과 닉슨의 만찬 메뉴인 원숭이두개골, 제비집 요리 등이 큰 화제가 됐다.
1972년 긴 머리를 자르고 단발머리로 경기여고에 입학했다. 과연 전국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답게 학교 시설이나 선생님의 수준이 높았다. 경기여고 입학을 위해 미리 팀을 짜서 과외공부를 했던 아이들이 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아는 사람이 없던 나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 어색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배숙 <3> 두 언니와 자취하며 공부… 경기여고에 합격
입력 2016-04-19 1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