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의 이형종(27)은 쉬는 날인 18일에도 서울의 한 트레이닝 센터에서 몸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어렵게 다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형종은 서울고 시절 어느 누구보다 촉망받던 투수였다. 잘생긴 외모에 시속 150㎞ 강속구를 던지는 초고교급 투수였다. 2007년 대통령배 고교대회 때는 광주일고와 결승에서 9회 역전을 허용하자 눈물을 뿌리고 투구해 ‘눈물의 에이스’로 유명세를 치렀다. 당연히 이듬해 1차 지명으로 4억3000만원을 받고 LG에 입단했다. 그런데 입단 직후 오른쪽 팔꿈치 인대접합수술(토미존 서저리)을 받고 재활에 돌입했다. 길고 긴 재활 끝에 2010년 복귀해 첫 등판이었던 5월 16일 롯데전에서 승리를 따내며 훨훨 나는 듯 했다. 그러나 바로 그 경기를 마친 뒤 또 팔꿈치 통증이 재발했다. 투수로선 치명적인 두 번째 팔꿈치 부상으로 완전히 날개가 꺾인 셈이다. 그 사이 힘들고 아픈 마음에 당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박종훈 감독을 향해 날선 말을 해 큰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팀을 무단이탈해 임의탈퇴 처리됐다. 20대 초반에 선수 생명이 끝난 것이다.
그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어린 나이에 길고 긴 재활을 했다. 너무 아프고 힘들고 지쳤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후 이형종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골프선수로의 전향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세미프로 문턱에서 좌절됐다. 세미프로 퀄리파잉스쿨에 나가 78타를 쳐 커트라인인 77타에 1타 차로 떨어졌다. 야구 빼고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그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택했던 스포츠였지만 또 낙담하게 되자,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1년 동안 편의점과 호프집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근근이 생활했다. 이때 김병곤 전 LG 트레이너가 이형종의 마음을 다독였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그라운드”라고 했다. 그도 “골프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야구 밖에 없더라. 야구가 내 직업인데 천직을 놔두고 지금 뭘하고 있지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이형종은 김 트레이너와 몸을 착실히 만들었다. 달라진 마음가짐과 노력을 안 LG도 2013년 임의탈퇴 신분을 해제해 그에게 기회를 줬다. 그리고 이형종은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투수 글러브를 벗고 배트를 집어 들었다.
촉망받던 에이스급 투수에서 평범한 2군 타자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는 묵묵히 훈련을 거듭했다. 1군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렀다. 성과가 나타났다. 지난해 2군에서 39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1리에 13타점, 5도루를 기록했다. 가능성을 확인한 양상문 감독은 이형종을 스프링캠프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양 감독은 개막 1주일 만에 그를 1군 엔트리에 넣었고, 지난 10일 문학 SK전에서 타자로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첫 안타도 신고했다. 12일 잠실에서 열린 롯데와의 홈경기에선 결승타를 기록하며 팀의 12대 11 대역전극의 주인공이 됐다. 수훈선수상을 받은 그에게 팬들은 “울지 마”를 연호했다.
이형종은 “나 자신도 놀라웠다. 이전에는 그렇게 (야구가) 안 되더니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도 들었다. 팬들이 내 이름을 외쳐 줬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고 전했다.
타자로서 이형종의 시작은 합격점이다. 그는 올 시즌 5경기에서 12타수 6안타를 쳤다. 타율이 무려 5할이다. 이형종은 “매 타석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집중력 있게 남들보다 열심히 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목표는 잡지 않고 있어요. 어느 위치에서든 팀에 필요한 선수가 되겠습니다. 제게 진짜 소중한 두 번째 기회를 준 LG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끝까지 남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제 다시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했다. 고교 시절 눈물의 투구를 회상하는 이형종의 얼굴은 이제 성숙한 20대 후반 프로야구선수의 모습이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눈물의 에이스’ LG 이형종 타자로 부활
입력 2016-04-19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