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6년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남5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집에선 아들이길 바랐는데 낳고 보니 딸이라서 무척 섭섭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를 자주 했다. 부모님은 내가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고 한다. 밤늦게 어머니가 나를 둘러업고 병원 문을 두드리던 기억이 난다.
몸이 약했던 나는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가든, 친구 집에 놀러 가든 항상 동화책을 꺼내놓고 읽었다. 유년 시절 빼놓을 수 없는 게 영화 이야기다. 아버지가 극장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언니들을 따라 자주 놀러갔었다. 그때는 영화보다 어머니, 아버지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극장은 놀이터였다.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아침에는 사촌들과 극장을 휘젓고 다녔다. 심지어 지붕 위까지 올라가 장난을 치곤했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지은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이 있다. 책 제목처럼 영화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 1960년대 다들 힘들고 못사는 상황이었지만 수입영화에 나오는 외국의 모습은 동경의 세계 그 자체였다. 엄앵란 신성일 등 청춘남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서울을 동경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즐거운 기억이 대부분이다. 특히 소풍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음식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의 김밥은 항상 인기였다. 당시 이리에는 유원지가 배산과 송화단 두 군데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오락시간에 당시 유명했던 코미디언 서영춘씨의 흉내를 냈더니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묘향산 등 산 이름을 대다가 갑자기 ‘영진 구론산’이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등 강 이름을 대다가 갑자기 ‘허장강’이라고 하는 등 지금 들으면 유치한 수준이었다.
아버지는 ‘여자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딸이라고 차별을 두지 않고 대학교육을 시켜준 분이다. 당신이 사업을 하시면서 ‘하면 된다, 어렵게 보여도 어디엔가 길이 있다’는 진리를 체험하셨는지 초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내게 종이를 한 장 내미셨다.
“배숙아, 여기에 판사가 되겠다는 각서를 써라.” 나는 판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어렵고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만 막연하게 들었다. ‘그래, 아버지가 하라는 것이니 좋은 것일 거야.’ 그대로 각서를 썼다. 아버지는 그 각서를 당신의 책상 옆에 붙여 놨다.
그때는 여자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물으면 거의 현모양처라고 답하던 시절이었다. 여성 판사라고 해봐야 고 이태영 황윤석 판사 딱 두 분뿐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딸을 판사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은 상당히 앞선 것이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법을 몰라 손해를 보신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 판사와 변호사를 다수 접하면서 ‘남을 도우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신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을 법조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어찌됐건 내가 법조인이 되고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선견지명과 동기부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셋째 딸에게 율사(律士)의 길을 권해주시지 않았다면 ‘여성검사 1호’의 영광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6학년이 되던 해부터 중학교 입시준비를 했다. 한 학년 위였던 고종사촌 오빠의 책을 물려받아 공부를 했다. 고모부는 고등학교 수학교사였다. 오빠는 고모부의 지도를 충실하게 받았는지 낱말 밑에 뜻이나 주석을 꼼꼼하게 달아 놓았다. 그 책으로 공부한 결과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이리 남성여중에 진학할 수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배숙 <2> 열 살도 안된 딸에게 “판사 되겠다는 각서 써라”
입력 2016-04-18 17:44 수정 2016-04-18 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