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4개의 敵 불러들인 에르도안 ‘술탄의 꿈’… 이슬람 모범국 터키, 대혼돈 속으로

입력 2016-04-18 20:34 수정 2016-04-18 21:30
5년 전 튀니지를 시작으로 중동 전 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열기가 분출했다. ‘아랍의 봄(Arab Spring)’이었다.

당시 아랍 지식층 사이에서 ‘이슬람 민주주의’의 모델로 회자된 나라가 터키였다. 서방(유럽)과의 경제적 유대, 의회민주주의, 터키·쿠르드·수니파 등 민족과 종파 간 화합, 약해지긴 했지만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시한 ‘세속주의’ 등은 무슬림이 대부분인 아랍국들이 지향해야 할 지침으로 보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핵심 회원국이기도 한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와 정치적 안정, 경제 활력에 힘입어 글로벌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터키는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2) 대통령의 강압 통치로 이슬람 민주주의 모델은 빛이 바랬고, 쿠르드 반군과의 무력충돌이 재발한 동남부는 사실상 내전 상태다. 러시아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 대부분의 인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 쿠르드 반군의 테러가 잇따르면서 터키 경제의 엔진인 관광산업까지 흔들리고 있다.

에르도안의 폭정

터키의 부상과 추락의 중심에는 2000년대 초 혜성같이 나타나 권력을 장악한 에르도안 대통령이 있다. 2001년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한 에르도안은 2003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총리로 12년간 재임했다. 지난해에는 총리 4연임을 금지하는 AKP의 당규에 가로막히자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됐다. 터키는 총리가 국정을 책임지는 의원내각제 국가임에도 막후에서 실권을 휘두르고 있다. 에르도안의 최대 현안은 장기 집권을 위해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때 그는 터키 민주화와 현대화를 이끈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받았다. 2012년까지 집권 10년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64%, 1인당 GDP는 43%나 증가하는 경제 기적도 이뤘다.

하지만 2013년 이후 에르도안은 언론과 노조, 진보파 지식인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며 독재자의 길을 걷고 있다. ‘21세기의 술탄’(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이 되려 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다. 특히 언론에 재갈 물리기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까지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다. 지난달 터키 법원은 에드로안을 강력히 비판한 최대 일간지 자만과 자만의 영자지 투데이스 자만에 이어 반정부 성향의 뉴스통신사에 대해서도 법정관리 명령을 내렸다.

미국의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지난달 ‘블라디미르 에르도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에르도안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빗대며 터키의 민주주의 후퇴를 비판했다.

쿠르드·IS와 ‘두 개의 전쟁’

해결 기미를 보이던 쿠르드족 문제 폭발도 터키 혼돈의 주요 원인이다. 터키 정부는 1년 전만 해도 실용주의와 민족 간 화해 원칙에 입각해 온건 쿠르드족을 포용함은 물론 독립을 추구하는 쿠르드족 무장세력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도 평화 협상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총선에서 과반 달성에 실패하고 쿠르드계 정당인 인민민주당(HDP)이 선전하자 평화 협상을 깨고 PKK와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집권 AKP는 쿠르드족과 대립각을 세워 터키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강경 보수 세력을 결집시킨 데 힘입어 11월 조기 총선에서 압승했다.

전문가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터키 전체 인구의 20%(약 1500만명)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을 적으로 돌리는 전략을 쓰는 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과거 터키정부는 미국도 테러단체로 불법화한 강경파 PKK만 표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 에르도안은 HDP 등 합법화되고 독립을 주장하지 않는 온건파 쿠르드 세력도 적대시한다. 그가 장기 집권을 위해 민족·종파 간 ‘편가르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쿠르드족 집단 거주지가 있는 터키 남동부에서는 9개월째 PKK와 터키 군·경 간 전투가 지속되고 있다. 터키군의 무차별 포격과 진압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수백명에 달하는 것은 물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디야르바키르의 수르 역사지구도 심하게 파괴됐다.

아울러 터키 정부는 시리아 내전을 틈타 북부 시리아에서 독자적 영토와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시리아 쿠르드 민주동맹당(PYD)에도 공세를 펴고 있다. PKK와 PYD는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키군은 국내와 시리아 등 2개국에 걸쳐 쿠르드족 반군과 전쟁을 치르는 형국이다.

이뿐 아니다. 당초 터키는 시리아 내전에서 PYD를 주적으로 삼는 반면 미국과 유럽이 퇴치에 나선 IS의 활동은 묵인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이 강력히 항의하자 IS의 자금원인 원유 밀거래를 봉쇄하고 IS 공습에 긴요한 남부 인지를릭 공군기지를 미군에 제공했다. 그러자 IS는 터키 민간인과 관광객을 겨냥한 무차별 테러로 보복하고 있다.

하지만 무장세력과의 싸움은 쉽지 않다. IS와 PKK는 지난해 8월 이후 7차례나 번갈아 가며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치안 불안이 지속될 경우 외국인 투자 등 경제활동 위축과 정정 불안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터키 국내총생산(GDP)의 4%를 차지하며 전체 취업 인구의 7%인 100만여명이 종사하는 관광업의 타격이 심각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성수기인 올 여름 터키 관광 예약이 지난해에 비해 40% 감소했고 호텔 객실점유율은 절반 이상 줄었다면서 호텔, 민박집, 고급 리조트 등 수백 곳이 매물로 쌓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최근 국무부·국방부 직원들에게 터키 남부에서 떠날 것을 권고한 데 이어 9일 터키의 주요 관광지를 겨냥한 테러 위협이 있다며 자국민에게 터키 여행을 다시 경고했다. 터키 주재 미국 영사관은 “특히 이스탄불과 안탈리아 등 터키 유명 관광지에서 테러가 발생할 위협이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정부도 자국민에게 터키 여행을 자제하고 가능한 한 빨리 터키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쿠르드 반군은 물론 IS와도 전쟁을 벌이면서 터키가 동시에 너무 많은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교적 고립 조짐

대외정책도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터키 전투기가 시리아 국경 인근에서 시리아 공습작전에 참여한 러시아 전폭기를 격추한 것은 에르도안의 외교정책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터키의 거듭되는 관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터키의 공식 사과가 없는 한 관계 정상화는 없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의 쿠르드족 정치세력인 PYD에 힘을 실어주고 터키의 IS 지원설 등을 퍼뜨리며 터키를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와 척진 데 따른 터키의 경제적 타격도 상당하다. 러시아는 자국 전투기 격추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해 11월 관광, 에너지, 무역, 식품, 건설 등 광범위한 대터키 경제 제재를 발표했다. 터키 일간 휴리에트에 따르면 러시아 경제 제재로 특히 무역과 관광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11∼12월 대러시아 수출은 40%가량 줄었고, 안탈리아 등 러시아 관광객이 북적이던 휴양지는 텅텅 비고 있다. 터키 최대 경제·금융 정책 연구기관인 TEPAV는 러시아의 경제 제재로 인한 터키 경제 손실이 올해에만 830억 달러(100조 2888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터키가 이라크 군경 훈련을 명목으로 터키군을 이라크 북부에 파병하면서 이라크와도 관계가 악화됐다. 이집트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요르단 예멘 등 22개국이 가입한 아랍연맹도 터키군의 철군을 요구했다.

2013년 7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 정부와의 관계도 껄끄럽기 그지없다. 갈수록 친이슬람 색채를 드러내고 있는 에르도안은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시시 대통령에 의해 축출된 ‘무슬림형제단’의 최대 후원자였다. 총리로 재임할 때 시시 대통령을 독재자로 비난해 이집트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는 등 양국은 냉랭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약 200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고 있지만 시리아 내전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IS 퇴치전에 시리아 내 쿠르드 세력이 가장 전과를 올리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PYD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터키의 자국 전투기 격추에 격분한 러시아도 IS 격퇴전의 중심 세력으로 PYD를 지원하자는 미국 뜻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 터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배병우 선임기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