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다국적 기업 오라클이 끼워팔기한 불공정행위를 확인했다.”(2015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 신영선 사무처장)
“오라클의 제품 판매는 끼워팔기를 적용할 수 없는 구조로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2016년 4월, 공정위 유선주 심판관리관)
공정위가 조사(검찰)와 심판(법원) 기능을 모두 갖고 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국민들은 한입으로 두말하는 공정위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최근에는 두 기능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를 깨고 심판 기능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공정위 체제가 확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20대 국회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소신과도 맞닿아 있어 향후 경제민주화의 핵심 안건으로 부상할지 주목된다.
◇무혐의 많아진 이유는?=공정위는 지난해 11월 금호아시아나의 계열사 부당지원 의혹 사건에 무혐의 결정을 하는 등 최근 6개월 새 중요 사건을 무혐의로 접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재판관 격인 전원위원 사이에서 불공정 혐의 여부를 두고 격론이 오가는 사건은 대부분 무혐의로 귀결되고 있다. 전원위원회 측은 증거 불충분(조사 부실)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전원위원회 관계자는 17일 “불공정행위를 했다는 심증은 있지만 이를 입증할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2심법원에 올라가면 깨질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과징금을 부과하느냐”고 말했다. 검사 입장인 심사관들이 혐의 입증에 자신이 없어도 “봐준 거 아니냐”고 따질 감사원 감사가 두려워 일단 전원위원회에 사건 판단을 떠넘기는 관행이 강해졌다는 게 전원위원들의 시각이다.
반대로 전원위원회가 형사재판식의 엄격한 증거주의를 들이대면서 면죄부가 남발된다는 지적도 있다. 공정위가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이 법원에 가서 패소하는 경우가 잇따르면서 혐의 입증 기준을 지나치게 강화했다는 것이다. 조사를 담당하는 공정위 관계자는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 격)가 갑자기 부실해질 리 있겠느냐“면서 “현 인력과 조사 여건에서 전원위원회가 원하는 혐의 입증을 만족시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전직 공정위 고위 관계자도 “형사재판은 엄격한 무죄 추정 원칙으로 진행하는 것이 맞지만 공정위 사건은 실체의 공정성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전원위원회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고 있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존재이유 희미해지는 공정위=공정위는 지난해 기업 방어권을 강화한 ‘사건처리 3.0’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조사 직후 담당 과장이 피조사 업체에 불편한 건 없었는지 확인하는 ‘해피콜’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가뜩이나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권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의 불법행위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기 위해 기업을 추궁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현실에서 전원위원회의 강화된 증거주의를 채택해 앞으로도 무혐의 사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정위의 이런 흐름은 기업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 “웬만하면 못 잡는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기업에 대한 불공정행위 예방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준에 맞는지도 의문이다. 2013년 7월 공정위가 구글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선(先)탑재에 무혐의 결정을 했는데, 지난해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가 같은 혐의로 구글을 제소했다. 대형 로펌 관계자는 “이번 오라클의 무혐의 결정도 한국이 앞장서서 전 세계 경쟁 당국의 손발을 묶은 셈”이라고 말했다.
◇상임 재판관 80%는 TK 출신 직업공무원, 개방성·전문성·투명성 키워야=공정위 전원위원회는 5명의 상임과 4명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본업이 따로 있는 비상임보다는 공정위원장 등을 포함한 5명 상임위원의 판단이 판결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5명 모두 행시 출신이다. 그중 4명은 대구·경북(TK) 출신이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이황 교수는 “위원회는 다양한 분야의 위원들이 모여 치열한 논쟁을 통해 결론을 내는 게 바람직한데 지금 공정위는 그런 점에서 미흡하다”고 말했다. 관료 중심의 결정 구조는 오라클 무혐의 결정에 앞서 미국의 외압 의혹이 불거지는 등 정치적 외풍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무혐의 결정이 나올 때마다 사건을 조사한 심사관들은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는다. 전원위원회 위원장이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공정위원장이어서 무혐의 결정에 반박하고 싶어도 의견을 드러내기 힘들다. 설사 의견을 제시해도 재심 절차가 없다. 공정위가 1심 판결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지만 검찰과 법원의 관계처럼 상호 견제 기능이 없는 게 한계다.
법원은 무죄 판결 이유를 담은 판결문을 공개하지만 공정위는 무혐의 사건에 대해 의결서조차 작성하지 않는다. 외부에서는 왜 무혐의가 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불투명한 구조다.
공정위가 최근 강조하는 1심 재판부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혐의를 양산하는 엄격한 증거주의 채택보다 심판 기능의 독립 등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민의당이 지난 2월 창당 1호 법안으로 공정위 상임위원 수를 5명에서 7명으로, 임기를 3년에서 5년으로 늘리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국민의당 장병완 정책위의장은 “20대 국회가 개원되면 개정안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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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deep-조사·심판 기능 문제없나] 줄줄이 헛발질 공정위, 요즘 왜 그래?
입력 2016-04-18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