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사직동은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이 축조한 경희궁과 맞닿은 땅이다. 80년을 훌쩍 넘긴 한옥과 일본식 근대주택 그리고 서양식 근대주택이 공존한다. 인근에는 사직단이 있고 전통한옥, 근대주택과 함께 문무관의 집터가 산재해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직동 3종 세트’로 통하는 명소가 있다. 청와대와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 사직터널 인근 언덕에 있는 작곡가 ‘홍난파의 집’과 함께 ‘딜쿠샤 저택’과 ‘권율 장군 집터 은행나무’다.
3·1독립운동을 처음 세계에 알렸던 미국 UPI통신 한국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딜쿠샤’(행복한 마음)는 등록문화재로, 지붕 모양이나 벽돌 한 장도 남다른 자태를 보여주는 서양식 근대 건축물이다. 화려함도 세련됨도 없고 심지어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고 생각하게 한다. 권율 장군의 집터를 지키고 있는 400여년 된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딜쿠샤 앞을 지나 조금 내려온 뒤 일부 소실된 성곽지점 삼거리에서 왼쪽 송월길로 내려가다 보면 좀 더 아담한 붉은 벽돌집이 눈길을 끈다.
딜쿠샤가 군더더기 없는 남성적인 이미지를 지녔다고 한다면 홍난파 선생이 생을 마감한 이 집은 조선 근대 여성의 모습처럼 모던하다. 창문틀과 현관문은 모두 격자형 나무재질이며 담쟁이 넝쿨은 마치 봄날 스카프를 두른 여인처럼 벽돌을 감싸고 있다. 독일계 선교사가 짓고 살았던 집으로 역시 등록문화재이다.
사직동의 풍경에 빠져들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1148가구 규모의 돈의문 뉴타운이다. 성곽 밖 경사면에 위치한 교남동 비좁은 골목길과 노후가 심각한 집들은 편리한 도로와 아파트를 얻게 되었지만 옛 골목길과 물길, 한옥을 터전으로 살아온 삶의 흔적은 이제 더 이상 간직할 수 없게 됐다.
1920년대 한옥 등 근대문화재급 수두룩
이런 아쉬움을 남기게 될 만한 곳이 하나 더 있다. 사직터널 위와 인근 언덕 위에 화강암을 켜켜이 쌓아 만든 파란색 지붕의 2층 양옥 두 채다. 집 앞의 넓은 마당에 서면 서촌 일대와 청와대가 한눈에 보인다. 주민들이 ‘선교사 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은 구한말 서울에 파견된 미국 남감리교 여성 선교사 조세핀 캠벨(1853∼1920)이 살았던 곳이다. 캠벨은 남감리교가 파송한 첫 여성 선교사였다.
구한말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집이 최근 교계는 물론 일반사회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7년 전 서울 사직2재개발구역에 지정됐기 때문이다. 이 구역은 2012년 고층 아파트(지상 12층·456가구)가 들어서는 사업 계획을 인가받았다.
조합 측은 2013년 재개발 사업 일부를 조정하는 사업시행인가변경을 신청한 상태로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조합 측이 추진하고 있는 재개발 사업이 서울시가 추구하는 문화재 보존 위주의 개발 방식과 어긋나는지 등에 관해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도시계획위원회 자문 결과에 따르면 사직2구역 재개발 지역에는 1906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캠벨 선교사 사택 외에도 1920년대 들어선 한옥과 일본인 저택, 해방 직후 건설된 교회 등 보존 가치가 많은 근대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선교사 사택은 지금이라도 근대문화재로 등록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라고 말했다.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송월1길 양의문교회 옥상에서 만난 대안공간311 코디네이터 장정화(49)씨는 사직동 129번지에 살았던 작가 한성옥씨가 남긴 ‘나의 사직동’이란 동화책을 소개했다.
“골목길에 노는 아이들과 파마하는 아주머니들, 한옥 마당에서 치렀던 동네 생일잔치, 개발로 인해 이웃인심에 찬물이 끼얹어진 상황과 어둠이 드리워진 모습, 그리고 몇 년 후 돌아와 보니 그때 사직동은 온데간데없고 똑같은 아파트만 들어선 모습을 묘사한 책이지요.”
장씨는 이 책을 가슴으로 읽었다고 했다. 지난해 9월 첫 금요일 사직동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했다.
‘대안공간 311’ 20일까지 전시
그날부터 장씨는 ‘사직2구역’에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곳에 둥지를 틀고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오랫동안 ‘재개발’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멈춰버린 듯한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입장은 조금씩 달라요. 어떤 분은 내가 낳은 자식들도 다 다른데 어찌 여기 사는 사람들 입장이 같을 수 있겠냐고도 하지요. 참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사직동에서 불편함을 불평하지 않고 마을의 가치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장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보존될지 철거될지 모르는 사직동과 주변의 모습을 사진과 그림으로 남기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리고 지난 1월부터는 다 쓰러져가는 한옥을 얻어 ‘대안공간 사직동311’이란 이름의 문화공간을 마련해 전시를 하고 있다. 주제는 모두 사직동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내려다보이는 골목풍경, 90년이 된 ‘ㅁ’자형 한옥, 경희궁 담장 쪽 경사면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 포플러가 흐드러진 캠벨 선교사의 집, 계단 있는 한옥, 한옥 대문 너머 보이는 캠벨 집의 지붕, 일본식 2층 기와집, 50년 넘은 양옥과 소박한 교회를 다양한 작가들과 함께 담아 전시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사직동을 그리다’(유희정·김승미 전)로 20일까지 이어진다.
25년 전 입양 갔던 청년 위탁모와 상봉
사직동의 역사지도를 살펴보면 ‘진품명품’이 따로 없다. 조선부터 근대화 역사에 획을 그은 인물의 집터와 집이 유난히도 많다. 장씨의 설명대로 동네가 손바닥에 들어오는 사직동 311번지 일대에는 간판도 없는 구멍가게 외에는 어떤 가게도 없다. 가게 주인인 신윤기(75)씨는 사직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신 할아버지는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우내 구멍가게 한 평 남짓한 방 안에서 난방도 없이 지냈다고 했다.
“옛날 6·25 때 성곽 주변에 움막집 짓고 살았었지, 나도 저 윗동네에 15평(49.5㎡)만 한 집을 짓고 살다가 여기로 내려왔어! 나야 평생 살아왔으니 어디 갈 데도 없고 계속 살고 싶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있나? 숨도 차고 몸이 아파서 잘 못 걸어요. 개발되면 난 또 어디로 가야 할지….”
20대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 이틀 전에는 T자 골목길 끝자락에 있는 한옥에서 눈물의 상봉식이 거행됐다. 반세기 전 갓 돌을 지난 몸으로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아기가 26세 청년이 돼 자신을 돌봐줬던 위탁모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은혜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양부모가 당시 위탁가정 주소와 세대주 이름, 전화번호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연이 알려지기 원치 않는다는 이 청년은 앞으로 2개월간 한국에 머물면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찾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사직동 311번지 언덕엔 까치와 산새가 유난히 많다. 골목 구석구석을 지키고 있는 노란 민들레와 작은 앵두나무와 제비꽃, 주인과 길을 잃은 개와 고양이들이 무언의 말을 건넨다. “여긴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사람에게 좋은 옥과 같은 곳이다. 화려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아니라 은은한 풀 향기와 같은 향을 지녔으며, 늘 있을 땐 볼품없어 보여 버리고도 싶지만 없어지고 나면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조세핀 캠벨 선교사
1897년 나이 44세때 서울에 파송… 배화학당 세우고 잣골교회 창립
조세핀 캠벨 선교사는 배화학당을 세워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복음과 지성의 씨를 뿌렸다.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의 감리교 목사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878년 캠벨 목사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하지만 27세에 남편과 사별한 뒤 두 자녀마저 병으로 잃는 슬픔을 겪었다.
졸지에 온 가족을 잃는 고난을 겪은 캠벨은 선교사가 돼 남은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34세 되던 1887년 중국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돼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10년 동안 다양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캠벨은 1897년 10월 남감리회가 파송한 첫 번째 여성 선교사로서 중국인 양녀(여도라)와 함께 한국에 왔다. 44세에 서울에 온 그는 여성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모색하다가 1898년 10월 2일 고간동(내자동)에서 학당(캐롤라이나 학당)을 열었다. 처음엔 남녀공학이었지만 1902년 남학생들을 ‘배재학당’으로 보낸 이후 여학당이 됐다. 그 후 1909년 여성을 아름답게 꽃피워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배화학당’이란 이름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후 약 10년 동안 캠벨 선교사는 배화학당의 설립자 겸 학당장으로 학교 발전에 헌신했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 8월부터 학당 기도실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예배를 토대로 1900년 4월에 잣골교회를 창립했다. 이듬해 9월 학당 안에 미국인 루이스 워커의 기부금으로 예배당을 신축해 자교교회의 모태가 된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을 헌당했다.
1918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한국에 낙농업을 보급하기 위해 준비했으나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디프테리아를 앓았다. 그는 더 집중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선교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2년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내한 4개월 만인 1920년 11월 12일 67세를 일기로 별세,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역에 묻혔다. 묘비에는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기록돼 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에 온 첫 여성 선교사 캠벨, 서울 사직동 사택 재개발사업으로 헐리나
입력 2016-04-15 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