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

입력 2016-04-15 18:50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에서 문정전 뜰에 놓인 뒤주에 들어가던 사도 세자는 이렇게 한맺힌 절규를 쏟아냅니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뒤주 속 같더이다!”

세월호는 현대판 뒤주와 같습니다. 304명이 구조 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고 그 가운데 아홉 구의 시신을 아직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미수습자 가족의 슬픔은 매우 큽니다. 그들의 소원은 속히 ‘유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나갈 때마다 안산 단원고 희생자들의 부모를 만납니다. 그들은 삭발하고 단식하고 노숙합니다. 어떤 아빠는 양치하는 데 이가 그냥 빠졌다고 합니다. 딸을 잃은 극한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엄마들이 너무 아픕니다. 너무나 소중한 자녀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오늘 본문에 나온 강도 만난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는 강도 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면 응급조치를 하고 구조 요청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치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제사 업무를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외형상 그들은 경건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우리의 경건은 기도와 묵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묵상은 경건한 삶을 위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경건은 고난 받는 이웃을 돌보는 마음가짐과 삶입니다. 이런 마음가짐과 삶을 위해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입니다.

구약 성경은 끊임없이 공의와 정의를 말합니다. 아울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들은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들에 의해 짓밟힐 수 있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때 ‘공의’로운 사회라고 합니다.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여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는 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하나님나라가 아닙니다.

교회가 가득한 우리 사회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습니까? 혹 ‘힘’이 곧 정의가 되어버린 사회는 아닌지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만일 구약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빼버린다면 하나님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나라가 되기 위해 한국교회는 정의로워야 합니다. 고난 받는 이웃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응급조치하고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에 맡겼습니다. 추가 비용 지불을 약속하고 끝까지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에게 멸시받았지만 생명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게 더 가까웠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있었고 약자에 대한 정의실천이 있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멈추지 말고,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이어갑시다. 교회는 고난받는 이들과 끝까지 함께해야 합니다.

양민철 목사 (구리 희망찬교회)

약력=△1963년 서울 출생 △교회2.0목회자운동 실행위원 역임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천막카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