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화가’ 변관식 40주기전

입력 2016-04-17 20:44 수정 2016-04-17 21:52
‘촌락풍일’(1957) 부분. 종이에 수묵담채. 133.5x42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일제강점기와 해방, 근대화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지사형 수묵화가’ 소정 변관식(1899∼1976). 그는 ‘금강산의 화가’로도 통한다. ‘외금강 삼선암 추색(秋色)’ ‘금강산 옥류천’ 등 대표작에서 보듯 신령한 명산을 꼬장꼬장한 것 같으면서도 분방한 붓질로 표현했다. 그가 그린 금강산은 수려하다기보다는 기골이 장대하다. 갈필로 먹을 켜켜이 쌓고(적묵) 뻗치듯 점을 찍어 선이 툭툭 끊기듯 이어지는데, 산하가 피돌기를 하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변관식 40주기전이 열리고 있다. 그가 타계하기 전까지 생애 마지막 22년을 살았던 서울 성북 지역에 위치한 성북구립미술관에서다. 일명 ‘아리랑고개’ 인근에 위치했던 자신의 집을 변관식은 ‘돈암산방’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금강산 그림을 비롯한 실경산수의 산실이 됐다.

변관식은 안중식, 김규진과 함께 개화기 3대 화가로 꼽혔던 조석진의 외손자다. 외할아버지는 아끼는 외손자가 ‘환쟁이’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관립 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화가의 길을 걷겠다는 외손자를 말리지 못했다. 변관식은 조석진과 안중식이 이끈 서화교육기관인 서화협회에서 이상범, 김은호 등과 함께 수학했다. 일본 유학도 다녀왔던 그였지만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던 조선미술전람회 등 제도권 미술을 거부하며 야인의 길을 걸었다.

1937년 이후엔 서울을 떠나 금강산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 사생을 했다. 그때 다진 근간이 1954년부터 살았던 돈암산방 시절에 만개한 것이다. 18세기 화가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를 계승했다. 우리 땅에 대한 그의 애정은 곡진해 ‘도화도’ 등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그림을 그릴 때도 기와집과 도포자락 선비를 넣는 등 한국화했다.

수려하고 장엄한 명산뿐 아니라 주변의 야산과 논밭까지 화폭에 담는 등 산수화의 파격을 선보였다. 이런 풍경 속에는 서민들의 모습이 풍속화처럼 담겨 있게 마련이다. 도포 입고 지팡이 짚은 채 걸어가는 노인은 거의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콘이다. 마을의 오솔길을 걸어가는 선비들이 있는가 하면 멀리 개울 건너 논에서는 함께 모여 모를 심는 농부, 새참을 나르는 아낙네가 있다. 부분 부분은 풍속화로서도 손색이 없다.

주변의 풍경을 기록하는 화가의 자세는 드로잉 작품이 증거한다. 축대 위 집들이 즐비한 돈암동 특유의 주택가 풍경, 자택 안 펌프 주변에서 설거지 하는 여인, 야외에 놀러 나온 노인들 등 일상의 평범한 모습에 눈길을 준다. 그가 조선 후기 최고의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를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인 1000원. 5월 22일까지(02-6925-5011).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