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 녹색돌풍이 재연됐다. 1996년 4·11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이 충청권 독식을 기반으로 원내 제3당이 된 이후 딱 20년 만이다. 이번 주역은 국민의당. 우연의 일치인지, 두 당의 상징색은 나란히 녹색이다.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50석을 확보하며 139석에 그친 신한국당을 과반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제1야당 국민회의는 79석을 얻었다. 2016년 4·13총선에서 호남을 휩쓴 국민의당의 바람은 더 매서웠다. 자민련에 비해 의석은 38석으로 적지만 새누리당(122석)의 과반 의석을 허문 데 그치고 않고 더불어민주당을 일약 1당(123석)으로 밀어 올렸다.
국민의당 대표 안철수(이하 경칭 생략)는 20대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3개의 ‘선택지’를 제공했다. 우선 호남인들에게 민주당 계열이 아닌 정당을 찍어도 되는, 전례 없던 ‘기회’를 줬다. 그간 이 지역 유권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민주당 계열을 지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맘에 들지는 않지만 개혁·진보 진영의 보루인 우리마저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책임감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당을 찍어도 정권교체나 호남정치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둘째, 수도권의 중도보수 유권자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줬다. 새누리당은 지지하고 싶지 않지만 더민주는 더 싫은 이들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수도권 40, 50대 중도보수층을 국민의당이 흡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적게는 5%, 많게는 10% 이상이라는 관측이다.
셋째, ‘교차투표’다. 양당 체제에서는 ‘일렬투표’가 광범위했다. 1번 후보를 선택하면 정당표도 1번에 주고, 2번이 좋으면 후보와 정당 모두 2번을 찍었다. 하지만 국민의당으로 인해 후보와 당을 분리해 한 표씩 행사하는 유권자들이 크게 늘었다. 상대적으로 수도권의 더민주 후보가 덕을 봤다는 평가다. 국민의당 정당지지율이 더민주보다 높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안철수가 던진 ‘신의 한 수’에 국민들이 절묘한 표심으로 화답한 셈이다.
그럼 대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97년 대선은 96년 총선 뒤 1년8개월 만에 치러졌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의 남은 기간과 일치한다. 스무 해 전 녹색바람을 탄 김종필(JP)은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사이에서 줄을 타며 김대중(DJ)과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였다. 몸값을 잔뜩 올리던 그는 결국 국민회의의 손을 들어줬고 DJ는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작금의 안철수는 JP와 출발점이 다르다. ‘킹메이커’로 내각제를 비롯한 공동정권의 지분에 마음이 더 가 있었던 JP와 달리 안철수는 ‘킹’이 목표다. ‘몸집보다 훨씬 큰 힘을 갖게 된 제3당’의 안철수가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성(牙城) 호남이 무너지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더민주는 수도권에서 강력한 당이 됐으며, 영남에서는 다수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현실적으로 더민주와의 대선후보 단일화가 없으면 안철수가 19대 대통령이 되기 쉽지 않다. 국민의당이 호남에만 갇혀 있을 경우 그가 이전 문재인을 공격했던 논리대로 ‘표의 확장성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안 없이 호남을 이탈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과거 충청권 맹주였던 JP는 내각제 이행을 DJ에게 양보하고 나서 정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역설적이게도 야권의 권력지형 변화는 총선에서 참패한 새누리당이 제공할 개연성이 크다. 여권이 전열을 정비해 유력 대선주자를 생산해 내면 야권이 다시 뭉칠 수 있다. 이 경우 안철수는 덩치가 세 배나 더 큰 상대를 잡아야 한다. 이래저래 4·13총선이 정치권에 던진 충격파는 상상 이상이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여의춘추-한민수] 안철수가 준 3개의 ‘선택지’와 대선
입력 2016-04-14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