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진영] 내 몸에 대한 갑질

입력 2016-04-13 17:44

두드러기 치료를 위해 최근까지 피부과를 다녔다. 상태를 본 의사의 진단이 독특했다. 두드러기는 원인을 딱 집어 설명하기 어렵다면서 그는 “면역력이 떨어지면 쉽게 걸리는데…”라며 “아마 환자분이 몸에 갑질을 많이 하신 모양이네요”라고 했다. 약을 처방한 후 음식을 가리고 푹 쉴 것을 권했다. ‘내가 내 몸에 갑질을 했다니.’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곧 피식 웃었다. 몸을 함부로 혹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회적 위계를 구분 짓는 갑질의 용례를 질병에 끌어오다니, 기발했다.

갑질 목격은 거의 일상적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병원과 제약업체, 본사와 가맹업체 등 곳곳에서 갑의 횡포가 잦다. 며칠 전 국민일보에는 교회 내 신도들 사이의 갑질을 걱정하는 목회자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재벌의 갑질은 자기진화를 거듭해 본능 수준에 이르렀다. 육체와 함께 인격 전체를 속박하는 인신예속(人身隸屬)적 양상을 띤다. 사례는 ‘갑질 매뉴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갑질은 개인의 권위와 조직의 권력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가장 큰 폐해는 이익은 사유화하는 반면 손실은 사회화된다는 데 있다. 갑은 최소한 자기 만족감의 효용을 누린다. 그러나 당하는 을은 물론 갑이 속한 조직은 잘못 없이 억울한 비용을 치른다. 공분이 퍼지면서 사회적 안정감은 손상된다. 한 경제학자는 갑질을 공해, 폐수, 소음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 손해를 끼치는 ‘외부불경제’라고 했다.

새누리당이 눈길 끄는 공약을 했다. ‘대한민국과의 계약’이란 제목의 5대 개혁과제 공약 중 첫째를 ‘갑을개혁’으로 꼽았다. 20대 국회 1년이 지나도록 ‘갑질 피해 보호법’ 제정 등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1년 치 세비를 반납하겠다고 공언했다. 오늘, 새 임기의 국회의원 300명이 뽑혔다. 이들은 다음 달부터 일을 시작한다. 여야를 떠나 5월 새 국회 첫 활동으로 갑의 무제한적 권리를 규율하는 데 힘을 모아보면 어떨까.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