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일을 하긴 하는데…. 생계가 어려워서 그랬습니다.”
앳된 얼굴의 이모(24)씨는 지난 5일 서울남부지법 106호 법정에 섰다. 증언대에 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혐의는 경범죄처벌법 3조 8항 위반(호객행위). 즉결심판 대상이다.
이씨는 지난달 29일 영등포역 인근 유흥가에서 노래방 전화번호가 들어간 명함을 돌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호객행위를 하다 걸리면 벌금은 주인이 아닌 이씨 같은 ‘알바’의 몫이다.
담당 판사는 생계가 어려워서 그랬다는 걸 인정했지만 벌금 5만원을 선고했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2만5000원을 1일로 환산해 유치장에 구금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엄정하게 법을 집행할 수밖에 없는 판사는 좀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씨에게 “벌금형을 받은 기록이 남으면 좋지 않다. 나중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해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남루한 오늘
즉결심판은 증거가 명백하고 죄질이 경미한 범죄 사건을 심리한다. 경찰은 2014년 한 해에만 4만5263건의 즉결심판을 청구했다. 매년 5만건 정도의 사건들이 즉결심판을 받는다. 즉결심판 법정은 우리 사회의 ‘고단하고 남루한 오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민들의 ‘사연’과 ‘변명’이 뒤섞여 있다.
같은 날 즉결심판이 진행된 서울북부지법 201호 법정에선 보험설계사 이모(35)씨의 하소연이 눈길을 끌었다. 이씨는 지난달 한 낚시매장에서 5200원짜리 낚시용품을 훔친 혐의(절도)로 법정에 섰다. 그는 “고객과 함께 낚시용품 매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고객이 현금이 없다며 하나만 사 달라고 했다”면서 “현금도 없고 카드도 없었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낚시용품을 집어 들었다”고 말했다.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인정한다”면서도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았다. 방청석에 앉아 자신의 즉결심판 순서를 기다리던 이들마저 귀를 기울였다. “수중에 5200원조차 없는 형편이 불쌍하다”는 수군거림이 나왔다. 벌금 10만원을 선고받은 이씨는 터벅터벅 증언대를 내려왔다.
궁색한 변명들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이들도 있지만 궁색한 변명도 많다. 임모(54·여)씨는 지난 2월 26일 구로구의 한 은행 ATM에 놓여 있던 지갑을 가지고 간 혐의(점유물이탈횡령)를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집을 경매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주인을 찾아준다는 걸 깜빡 잊었을 뿐 훔칠 생각은 없었다”고 발뺌했다. 서울 남부지법은 지난 8일 임씨에게 벌금 20만원을 선고했다.
임씨에 이어 증언대에 오른 양모(58)씨는 지난 1일 친구 다섯 명과 함께 카드 도박을 했다. 당시 현장에서 판돈 30만원이 발견됐다. 양씨는 “친구 한 명이 주머니에 있던 돈을 흘려서 판돈이 늘어난 것 같다”고 둘러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판사는 솔직하게 말하라고 다그치며 5만원의 벌금형을 내렸다.
즉결심판 법정에서 가장 흔한 변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유모(76)씨는 마트에서 멸치액젓을 훔친 혐의(절도)로 6일 서울 북부지법에 나왔다. 그는 “멸치액젓 한 통을 결제하고 집에 갖다 뒀는데, 그걸 모르고 또 한 통을 가져간 모양”이라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법원은 유씨에게 벌금 5만원을 선고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사연들이 즉결심판 법정에 오른다. ‘자정이 되면 문을 닫는다’는 종업원의 말에 유모(50)씨가 화가 난 건 지난 2월 28일 오후 11시50분쯤이었다. 중랑구의 한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던 유씨는 남은 술을 마저 마시지 않고 버텼다. 결국 종업원의 퇴근을 막은 혐의(업무방해)로 벌금 5만원을 내게 됐다.
술 때문에 오는 이들도 많다. 박모(45)씨는 어린이집 담장을 넘은 혐의(주거침입)로 6일 서울 북부지법 즉결심판 법정에 섰다.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잔칫집에 갔다가 술에 취해 우리 집인 줄 착각했다”고 답했다. 박씨에겐 벌금 5만원이 선고됐다.
즉결심판 법정에선 ‘벌금이 일당보다 크다’는 항변, ‘나는 잘못이 없다’는 변명,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하소연이 일상이다. 일선경찰서에서 즉결심판을 담당하는 한 경찰관은 12일 “소액 절도, 도박, 호객행위로 즉결심판에 넘겨지는 경우가 많다. 같은 잘못으로 여러 차례 즉결심판에 넘겨지거나 벌금 몇 만원을 내지 못하고 유치장 신세를 지는 걸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호객행위 알바생… 액젓 훔친 할아버지… 고단한 삶, 그늘진 사연들
입력 2016-04-13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