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액수의 돈이라도 그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일용직 근로자에게 100만원은 만져보기 어려운 돈이지만 수백억원대 자산가에겐 푼돈 축에도 못 낀다. 교통법규 위반 범칙금(과태료 포함)도 마찬가지다. 범칙금은 위반 내용 및 장소, 차종에 따라 3만∼14만원이다. 그러나 생계형 트럭 운전자와 고급 승용차 소유주가 느끼는 부담은 천양지차다.
생계형 운전자에겐 하루벌이지만 현대가(家) 일원인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에겐 ‘껌값’도 안 됐던 모양이다. 그가 한 달에 낸 교통위반 범칙금이 500만∼6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보통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엄청난 액수다. 정 사장 수행 매뉴얼에 “차량 운행 시 빨리 가자는 말씀이 있을 경우 위험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신호, 차선, 과속카메라, 버스전용차로 무시하고 목적지 도착이 우선임”이라고 적혀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교통법규는 없는 사람이나 지키는 것이다.
재벌인 그에게 수만원의 과태료는 징치의 수단이 되지 못했다. 그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게 우선이지 푼돈의 과태료는 문제가 안 됐다.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똑같은 범칙금을 부과하는 현행 총액벌금제로는 이 같은 갑질을 막기 어렵다. 그래서 1921년 핀란드를 필두로 스웨덴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소득수준에 따라 벌금액에 차이를 두는 일수벌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핀란드의 대표기업 노키아의 안시 반요키 부사장과 육가공식품업체 상속자 유씨 살로노야는 각각 25㎞/h, 40㎞/h를 과속했다 11만6000유로(당시 환율 1억8000만원), 17만 유로(2억600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이 정도는 돼야 수천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고액소득자에게 징벌의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명박정부 때 일수벌금제 도입 논의가 있었으나 보수층의 반발로 무산된 게 못내 아쉽다. 이때 도입됐더라면 지금처럼 정 사장이 교통법규를 밥 먹듯 위반했을까.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한마당-이흥우] 재벌에겐 ‘껌값’ 범칙금
입력 2016-04-12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