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에 사는 한지연(가명·42)씨는 최근 이사를 앞두고 집주인에게서 ‘사용시설물 원상회복 성실 이행 최고서’라는 제목의 우편물을 내용증명으로 받았다. 2년 전세를 사는 동안 ‘사용 관리 부주의’로 파손됐거나 오염된 부분을 이사 가기 전까지 원상회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세입자인 한씨가 스스로 수선해놓지 않으려면 복구비용을 배상해 달라는 요구도 들어 있었다. 한씨는 “1억원 가까이 오른 전셋값에 밀려나듯 이사 나가는 상황인데,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런 내용증명을 받으니 정말 서러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사용 부주의로 파손·오염된 것’이 어디까지인지 막막했다. 한씨는 “이번엔 다행히 넘어갔지만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앞으로 무서워서 남의 집에 살겠느냐”면서 “대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지라도 명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 서러워지는 남의집살이=전세를 구해 들어가면서 집주인이 새로 도배 정도는 해주리라는 기대는 접어야 하는 시대다. 대신 세입자가 나갈 때 벽지나 마룻바닥, 못 자국 등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그 비용을 내라고 요구하는 집주인들이 늘고 있다.
최근 이사한 김미선(37·여)씨도 전 집주인에게 50만원을 건넨 이후에야 계약을 만료하고 이사를 나올 수 있었다. 벽지가 더러워지고 방문에 흠집이 생겼으니 원상회복비를 내놓으라는 것이 집주인의 요구였다. 벽지 오염 등은 법원 판례상 원상회복 의무와 무관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막무가내인 집주인에게는 법원 판례도 통하지 않았다. 당장 새 전셋집 계약일에 맞춰 보증금을 받아 나가야 하는 김씨로서는 집주인에게 수리비를 건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인심’이 변한 가장 큰 이유는 수요공급 원리 때문이다. 11일 한국감정원의 ‘최근 전세수급 동향’을 보면 지난 3월 전국의 주택 전세 수요는 107.4였고, 수도권은 111.3에 달했다. 전세 공급과 수급이 일치하면 100인데, 수요가 공급을 크게 뛰어넘은 것이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굳이 집수리 비용까지 들여가면서 세입자를 구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여기에 저금리와 부동산 경기 침체라는 변수까지 더해졌다. 집을 가지고만 있어도 자산가치가 늘고, 전세보증금을 은행에만 넣어둬도 수익이 생기던 때와 비교하면 요즘 집주인은 전세를 줘서 얻는 이익이 확연히 줄었다. 못 자국 하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과거에는 험하게 사용해도 주택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주택 보존 상태와 집값이 관련 있다고 보는 것 같다”면서 “그렇다보니 집주인이 주택 손상에 엄격한 잣대를 갖다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어디까지가 원상회복? 늘어나는 분쟁=원래 원상회복 의무규정은 주로 상가 건물 임대 시 건물 구조를 변경하는 경우 등에 적용돼 왔다. 그런데 주택 임대차계약서에도 이 규정이 통상 들어가고, 이를 실제 활용하는 집주인이 늘어나면서 관련 분쟁이 많아지고 있다. 기준이 모호해서다. 일단 주택의 경우에도 집주인과 합의하지 않은 거실 확장이나 에어컨 환풍기 설치 등을 위해 뚫은 건물 외벽 등과 같은 구조변경은 원상회복 대상이다. 사람이 살면서 생기는 흠집이나 벽지 오염, 고장 등에 대해서는 세입자가 원상회복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법원 판례다.
그러나 고공 행진하는 전셋값에 ‘전세 난민’ 신세로 이사를 다니는 세입자가 법적 분쟁을 감수하긴 쉽지 않다. 국토교통부 등 소관부처는 임대차계약이 사적 계약이라는 이유로 별도 관리를 하지 않지만, 전세 물건이 희귀한 현실에서 ‘을’인 세입자가 임대차계약을 맺으면서 원상회복 규정을 피하긴 어렵다. 이렇다보니 역으로 집주인에게 그동안 아파트 관리비에 포함해 냈던 ‘장기수선충당금’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세입자도 늘고 있다. 상호 간에 ‘다툴 거리’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판례를 기준으로 한 표준약관 등을 마련해 분쟁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 교수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자연적 마모나 오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정도의 표준약관이라도 만들어서 제공할 필요가 있다”면서 “과거 상식적으로 통용되던 일들이 분쟁이 되는 만큼 세입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민영 기자, 세종=윤성민 기자 mymin@kmib.co.kr,
쫓겨 가면서도 세입자는 ‘乙’… ‘전세난 시대’ 원상복구 둘러싼 분쟁 급증
입력 2016-04-12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