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누적 흑자 17조원. 막대한 돈을 쌓아놓고는 왜 해마다 보험료를 올리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난치병 등으로 비싼 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정부가 적립금을 쓰지 않는 것을 원망한다.
그러나 정부는 적립금을 당장 국민 의료비 부담을 낮추는 데 쓸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보건·의료 시민단체들은 이러다간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 지원이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왜 흑자인가=10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건강보험 적립금은 16조9800억원이다. 건강보험은 2011년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된 뒤 해마다 흑자폭이 커지고 있다. 흑자가 계속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출 증가 속도가 수입 증가 속도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건보료 수입과 지출은 2011년부터 증가 속도에서 차이가 생겼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건보료 연평균 수입 증가율은 11.2%다. 반면 지출 증가율은 7.7%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 국민의 의료비 지출이 어느 정도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전반적인 위생상태가 좋아졌고 만성질환자들이 건강관리를 잘하는 등 ‘건강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데서 이유를 찾는다.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자 수는 늘고 있지만 각자가 쓰는 의료비는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보건사회연구원 신현웅 연구기획조정실장이 2013년 내놓은 보고서 ‘건강보험 진료비 분석 및 정책 방향’에 따르면 2011∼2012년 우리나라 60대의 1인당 월평균 진료비는 1.4% 감소했다. 50대도 1.3% 줄었다.
소득 양극화가 건강보험 흑자를 낳았다는 시각도 있다. 못사는 사람들에게 병원 문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서글픈 진단이다. 보건·의료 시민단체들은 “서민들이 높은 본인부담금 탓에 아파도 병원 이용을 자제해 매년 수조원씩 흑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장성 강화’에 못 쓰나 안 쓰나=건강보험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단위로 재정 운영을 하는 사회보험이다. 걷은 보험료는 그해 모두 국민의 의료비로 쓰는 게 이상적이다. 시민단체들은 이 원칙에 근거해 흑자가 난 돈을 건강보험 혜택 확대에 쓰라고 촉구한다. 어린이병원비연대는 “국가가 5152억원만 부담하면 어린이 780만명의 입원비를 100% 보장할 수 있다”며 “이는 건보 누적 흑자 17조원의 3%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정부는 당장 건보 흑자로 건강보험 혜택을 늘리는데, 즉 보장성을 강화하는데 난색을 표하고 있다. 보험료를 결정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보험료 인하나 동결을 제시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정부가 내세우는 논리 중 하나는 ‘2025년 건강보험 재정 고갈론’이다. 기획재정부는 “건강보험 재정이 2022년부터 적자로 돌아서고 2025년 고갈될 것”이라고 지난해 예측했다. 불과 10년 뒤면 재정난에 허덕일 것이므로 지금 충분한 돈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특정 의료행위에 건보 혜택을 적용하면 나중에 철회하기 어렵다는 것도 이유다. 강도태 복지부 건강보험정책국장은 “단기적 차원에서 건강보험 적용을 지금 바로 늘려버리면 나중에 보험료를 큰 폭으로 인상해야 할 수도 있다”며 “4대 중증 질환과 3대 비급여 분야를 중심으로 보장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고 지원 축소’ 위한 명분인가=시민단체들은 ‘2025년 고갈론’에 대해 65세 이상 노인 의료비를 상당 부분 국가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한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건보 재정이 고갈되는 건 고령화로 노인 의료비가 늘기 때문인데, 이를 건강보험료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여기에다 정부가 ‘적립금 17조원’을 건보에 대한 국고 지원 축소 명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냥 놔두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건보재정 수입은 국민이 낸 건보료와 국고 지원으로 구성된다. 건강보험법에는 ‘정부가 예산의 범위 내에서 건보료 예상 수입의 20%를 국고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다. 실제로는 15% 안팎만 국고가 투입되고 있지만 최근 해마다 수조원이 건보료로 들어갔다.
재정 당국은 수년 전부터 국고 지원 규모를 줄이고 싶어 했다. 한 전문가는 “기재부는 건보가 17조원을 쌓아두고 ‘이자 놀이’를 하고 있으며 정부가 빚을 내(채권을 발행해) 수조원을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고 20% 의무 지원’은 한시조항이다. 국회는 지난달 이 조항의 시한을 2017년 말까지로 연장했다. 올 하반기나 내년에 시한 재연장 여부를 놓고 재정 당국과 야당이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이때 적립금 규모가 클수록 재정 당국에 유리할 수 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팀장은 “건보 흑자가 오히려 재앙을 불러오고 있는 형국”이라고 했다.
정부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실탄 비축 차원에서 적립금을 쓰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어떤 대선 후보든 건강보험과 관련한 공약을 내놓을 텐데 지금 다 써버리면 다음 정부에서 쓸 돈이 없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건보 흑자 17조 ‘불편한 진실’
입력 2016-04-11 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