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정치와 제대로 붙어 볼까… ‘8체급 챔프’ 링의 전설 파퀴아오 은퇴

입력 2016-04-11 04:06
매니 파퀴아오가 10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MGM 그랜드에서 열린 티모시 브래들리와의 WBO 인터내셔널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판정승을 거둔 뒤 챔피언 벨트를 어깨에 두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복싱 사상 최초로 8개 체급에서 10번의 타이틀을 획득한 파퀴아오는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AP뉴시스

1990년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키바웨. 12세 소년이 링 위에 섰다. 어린 나이에 깡마른 소년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다. 그가 받은 대전료는 100페소(2달러).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돈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홀어머니와 6남매가 먹을 쌀을 살 수 있다는 기쁨때문이었다.

바로 복싱의 전설이 된 매니 파퀴아오(38)의 어린 시절 얘기다. 파퀴아오는 1978년 필리핀 민다나오섬 키바웨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동남아 빈민가였다. 코코넛 나무로 지붕과 벽을 만든 야자나무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6남매 중 넷째였지만, 그래도 아이들 중 가장 의젓했다. 6살 때부터 바닷가에 나가 어부로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됐다. 물고기를 잡고 난 후에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았다.

그런데 하루는 가족과 함께 얹혀살던 삼촌에게 처음 복싱을 배웠다. 또래 가운데 자신과 붙어 이긴 아이가 없었다. 동네 복싱대회에 참가해 돈을 벌었다. 그러나 온갖 허드렛일을 해도 늘 빈곤에 허덕였던 파퀴아오는 13살이 되던 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사흘 동안 밀항선을 타고 수도인 마닐라로 떠났다.

주먹 하나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노숙자 생활을 하며 열심히 복싱에 매달렸다. 이런 노력 덕분에 17살의 나이로 1995년 프로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파퀴아오는 제대로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상태였다. 그는 기준 계체량을 통과하기 위해 주머니에 무거운 돌과 잡동사니를 잔뜩 넣은 채 저울 위로 올라갔다고 회고했다.

그는 데뷔 첫 해 10전 전승을 기록했다. 1997년 동양 타이틀을 획득했고, 이듬해 플라이급으로 첫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승승장구했다. 그해 6월 IBF 세계 챔피언 레로 레드와바를 6라운드 TKO승으로 물리쳤다. 2008년 12월에는 미국의 ‘골든 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를 만나 예상을 깨고 특유의 소나기 펀치로 8라운드 TKO승을 거뒀다. 결국 그는 사상 최초로 8개 체급에서 10번의 타이틀을 획득하는 복싱의 전설이 됐다. ‘팩맨(Packman)’이란 별명은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전자오락 게임 주인공 이름에서 나왔다.

세월이 흘러 파퀴아오는 지난해 5월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판정패를 당했지만 그는 대전료 2억5000만 달러를 받았다. 가난 때문에 단돈 2달러를 받고 복싱을 해야 했던 소년이 25년 만에 무려 1억2500만 배나 많은 대전료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10일(한국시간) 파퀴아오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MGM 그랜드에서 은퇴경기를 열었다. 그는 티모시 브래들리(미국)와의 WBO 인터내셔널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3대 0,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통산 전적은 58승2무6패 38KO가 됐다. 그는 “복싱 팬들에게 고맙다. 이제 나는 은퇴한다.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사람들에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복싱선수로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파퀴아오는 정치인 생활에 전념한다. 그는 2010년 필리핀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됐고 2013년에는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올해 5월 선거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한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