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정구호(51)는 한국 패션계의 아이콘 같은 존재다. 2003년 제일모직이 브랜드 ‘구호’를 인수한 뒤 그는 10년간 제일모직 패션 부분을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 2013년 회사를 나온 뒤 지난해엔 구원투수로서 서울패션위크의 총감독이자 휠라코리아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패션계만이 아니라 예술계에서도 그는 각광받는 존재다. 영화 ‘황진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정사’ 등에서 의상, 인테리어, 헤어, 소품 등 아트 디렉팅을 담당해 상을 휩쓸었던 그는 최근 몇 년간은 무용 분야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 중이다.
미국 뉴욕 유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현대무용 안무가 안성수의 작품에서 의상 등 비주얼 부분을 맡아 경험을 쌓았던 그는 2012년 국립발레단의 대규모 창작 발레 ‘포이즈’에서 무대와 의상은 물론 연출까지 맡았다. 당시 안성수가 안무한 이 작품에서 그는 기존의 무용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무대미학을 선보였다. 이어 2013년 국립무용단에서 안성수가 안무한 ‘단’과 윤성주가 안무한 ‘묵향’의 무대, 의상, 연출을 맡아 센세이션을 일으킨데 이어 지난해 안무가 조흥동 등과 작업한 ‘향연’으로 정점을 찍었다.
오는 16∼1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다시 오르는 ‘향연’을 앞두고 지난 8일 만난 그는 다소 지쳐 보였다. 족히 1인5역은 넘어 보일 만큼 현재 맡고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공연이야말로 내겐 휴식이자 친구 같은 존재다. 창작을 할 수만 있다면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며 “내 아이디어가 필요한 분이 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도와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사군자로 대표되는 선비정신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표현한 ‘묵향’은 지난해 6월 일본 오사카와 지난 2월 홍콩에서 공연돼 호평을 받았다. 궁중·의식·민속 분야의 12가지 춤을 재해석한 ‘향연’ 역시 지난 1월 중국 베이징 무대에 올라 주목받았다. 한국 전통춤을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무대로 풀어낸 그에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총연출이라는 직함까지 주어졌다.
연출가로서 작품을 관통하는 개념은 물론 무대, 의상, 음악까지 깊이 관여하는 그는 “현대무용은 순수한 창작이기 때문에 연출가로서 자유로움이 많은 편인데 비해 한국 무용은 기본적인 틀이 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다”면서도 “하지만 한국무용의 경우 조금만 포인트를 줘도 그 효과가 크다. 나를 비롯해 외부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한국무용의 틀을 조금만 깨면 재밌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일례로 ‘향연’의 경우 의상에서 전통적인 오방색을 지워내고, 음악에서 국악을 리드하는 태평소를 빼는 대신 화음을 강화했다. 관객들이 무용수의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묵향’은 일부러 의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 아름다움은 신나고 활달한 색동저고리보다 우아하고 격조있는 달항아리에 있다고 본다. ‘향연’의 경우 전통 춤사위의 원형은 고수하되 무용수 구성과 의상, 음악 등 무대요소를 심플하고 모던하게 바꿨다”고 말했다.
평은 다소 엇갈린다. 관객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반면 무용계에서는 다소 불편하게 바라본다. 무용수가 아름다운 미장센 안에 갇혀 있다거나 전통춤의 원래 맛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최근 홍콩아트페스티벌에 초청된 ‘향연’에 대해 현지 관계자들이나 관객들이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줬다. ‘전통을 지키면서 현대적으로 재생산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밝혔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연출 역시 그가 최근 무용에서 보여줬던 ‘한국 전통미의 현대적 구현’이란 주제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아직 초기 단계라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 그는 “버겁긴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예술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K팝 등 대중문화 외에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한국적 미학은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인터뷰] 무용 연출로 각광받는 패션디자이너 정구호 “창작만 할 수 있다면 돈·명예는 바라지 않아”
입력 2016-04-10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