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돈’ 국고보조금] 유령법인 세우고 허위 수령자 정보 모아 나랏돈 꿀꺽

입력 2016-04-07 20:22



“시공업체가 보조사업자에게 접근, 자부담금 대납을 약속하는 단순한 범행은 옛날 얘기다. 국가 대책이 촘촘해질수록, 범행 수법들도 진보한다.”

국고보조금 재정누수 사건 수사 경험이 많은 한 특수통 검사는 부정수급 수법이 지능화되고 있다고 단언했다. 잇따른 종합대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혈세 비리는 통계로 입증된다. 7일 대검찰청 반부패부에 따르면 2013년 701명이던 보조금 편취사범은 지난해 1306명으로 늘었다. 부정수급액도 2014년 785억원에서 지난해 840억원으로 증가했다.

소개받기는 옛날 얘기… 개인정보를 모으는 법

보조사업자 선정 눈속임에 동원할 ‘조연’을 모으는 일부터가 교묘해지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1억3300여만원), 고용노동부(2억4700여만원), 보건복지부(1710만원) 등으로부터 골고루 국고보조금을 빼돌린 현모(45)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유령법인을 차려두고 2010년부터 대체근로자 채용, 청년인턴, 미취업 노인 고용 등을 실시한다며 나랏돈을 챙겨 2013년 제주지법에서 징역 3년형에 처해졌다.

그가 공무원을 속일 수 있었던 무기는 연령대별로 다양하게 구비한 총 86명의 인적사항이었다. 그는 구인광고를 내 구직자들로부터 각종 면접신청서를 제출받은 뒤 보조금 심사 서류로 활용했다. 구직자들을 고용할 것처럼 행세하며 의료보험 부양자신고 명목으로 가족 인적사항까지 제공받았다. 모교 후배인 고등학생들에게 접근, 장학금 지원서를 제출받아 개인정보를 모았다. 현씨는 여러 서류에서 전화번호만큼은 자신과 친척들의 번호를 기재했다. 기관에서 본인확인 전화가 오면 직접 받기 위해서였다.

복사하기? 요즘은 포토샵이 대세

보조금 지급 단초가 되는 허위서류 꾸미기 기술 역시 발전한다. 대구지법이 2014년 4월 징역 3년형을 선고한 건설사 대표 조모(46)씨는 재래식으로 복사기를 활용한 경우다. 그는 부하 직원을 시켜 기존에 있던 검사서류를 복사, 감리자의 서명 날인 부분만 오려내게 했다. 이를 검사조서 등의 감리자란에 붙여 다시 복사한 뒤 의성군청에 내 신축공사 보조금 18억3500여만원을 타냈다.

전자세금계산서 도입이 일반화된 현재는 이미지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을 활용한 수법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문화체육관광부는 포토샵을 통해 계산서를 위변조, 거래금액을 부풀리는 수법을 쓴 5개 보조사업 업체를 자체 감사로 적발해 수사 의뢰했다. 입금확인증까지 교묘하게 조작하는 이 수법은 이후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등의 수사에서도 재확인됐다.

재입금·선입금·파일이름 조작… 화려한 기술들

청주지검 충주지청의 지난해 5월 중소기업청 기술연구개발(R&D) 관련 수사는 편취사범들의 진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소기업청은 보조금 유용을 막기 위해 2012년부터 보조사업 대상기업에 주던 돈을 그들의 거래업체에 직접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하지만 편취사범들은 자격요건이 안 되는 업체들에 주관기관의 명의를 빌려줘 보조금을 지급받게 해 빼돌렸다. 기술개발과 관련 없는 채무 선지급금 명목으로 돈을 빼기도 했고, 완성된 기계를 사놓고서는 기술개발로 제작한 것처럼 허위 세금계산서 여러 장을 발행받았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실크연구원이 중소기업청의 바우처 사업을 악용, 13억여원을 챙기는 기술은 더욱 교묘했다. 전문적인 작업 내용에 의미 없는 기호나 숫자를 붙여 마치 연구를 위한 제작인 것처럼 기재한 것이다. 작업신청서에는 ‘no.wp16_01’, ‘no.wp16_02’ 식으로 서로 다른 제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꾸몄지만, 사실은 동일한 제품이 제작되는 것뿐이었다. 이 연구원 본부장 권모(54)씨는 2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나랏돈 관리자 모드

보조금이 수반되는 각종 직업훈련 프로그램 역시 편취사범들의 먹잇감이다. 이를 눈속임하는 기술은 첨단화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근로자 직업능력개발 인터넷 원격훈련’을 위탁 수행하던 강모(55)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보조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어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는 근로자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자동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관리자 모드’로 접속해 실행 버튼 하나만 누르면 교육훈련 대상자들의 학습 진도와 시험 답안까지 조작되는 식이었다.

6개 병원이 강씨의 프로그램을 활용했고, 한국산업인력공단은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총 6060건의 사례에 대해 국고보조금을 지급했다. 한 병원에는 1억원 넘는 돈이 흘러들어갔다. 하지만 99%에 해당하는 6022건은 로그인 과정이 없이 교육훈련과 관련한 시험이 이뤄진 것으로 조사됐다. 93%에 해당하는 5649건은 학습 종료 시간이 저장돼 있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은 사기 혐의로 기소된 강씨에게 2014년 9월 징역 2년8개월을 선고하며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교육훈련 과정을 조작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거의 모든 훈련수료 데이터가 조작됐다”고 개탄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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