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주토피아’와 막장 정치 드라마

입력 2016-04-07 18:43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4위로 출발한 영화가 한 달쯤 뒤에 정상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이 줄어드는 데다 신작이 나오기 때문이다. 근데 기적의 역주행으로 개봉 25일째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장기 흥행 중인 영화가 있어 국내 극장가의 화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Zoo+Utopia). 지난 2월 17일 개봉한 이 영화는 ‘데드풀’ ‘귀향’ 등에 눌리다 개봉 4주차와 5주차 연속 주말 1위를 차지하는 무서운 뒷심을 보였다. 그 후 2위로 내려앉았다가 8주차인 지난 5일과 6일(개봉 50일째) ‘배트맨 대 슈퍼맨’을 밀어내고 다시 정상을 밟는 신기한 마술까지 선보였다.

성인 관객이 찾을 정도의 입소문 효과다. 어른용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까지 나왔다. 탄탄한 스토리와 다채로운 영상미가 스크린을 장식한다. 육식·초식동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낙원의 도시 주토피아가 배경이다. 이곳에서 발생한 의문의 연쇄실종 사건을 최초의 토끼 경찰관과 여우 사기꾼 콤비가 추적하는 과정을 그렸다. 인간세계에 주는 교훈이 가볍지 않다. 기본 주제는 차별과 편견에 관한 것이다. 이쯤에서 그친다면 아이용이다. 사건 배후의 음모가 놀라운 반전(反轉)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 깊이 있는 메시지가 던져진다. 바로 비뚤어진 권력자의 통치술. 즉,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부(맹수와 초식동물) 갈등을 조장하는 ‘분열의 정치’가 끼친 해악이다.

여기서 우리 정치 현실이 투영된다.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벌어진 집권당의 막장 드라마는 전무후무한 여권 분열사(史)였다. 레임덕 방지용 사천(私薦)을 다룬 드라마는 패거리들의 내전 끝에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힌 유승민 축출로 마무리됐다. 절대 권력의 완장을 찬 친위대의 학살, 사상 초유의 옥새 반란 등은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흥미진진했다.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정치공학적 선거운동을 그린 후속편은 코미디의 끝판왕이다. 대통령 존영(尊影) 반납 논란으로 ‘여왕시대’ 예고편을 틀더니 진박(진짜 친박)의 유승민계 죽이기가 노골화된다. 한데 웬걸, 오만과 독선이 지나친 탓에 시청률이 저조하자 극본을 과감히 수정한다. 그것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극’으로. 대구 두류공원에서 친박 좌장과 진박 후보들이 무릎을 꿇고 공천 파동에 사죄하는 퍼포먼스가 엊그제 긴급 촬영된 이유다. ‘무성이 옥새 들고 나르샤’의 주인공도 다른 촬영지(충남)에서 동일한 용서를 구한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진정성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정치 쇼로 유권자를 우롱하고 있다. 이질적인 친박과 비박은 총선이 끝나면 곧바로 권력투쟁을 할 게 뻔하다. 그럼에도 지금은 한 표를 구걸하기 위해 손을 잡고 ‘반다송’(반성과 다짐의 노래)을 부른다. 정치혐오 현상이 괜히 생겨나는 게 아니다.

국민의 정치 환멸에는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일조했는데 계파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야권의 분열은 왜 지적하지 않느냐고 항의할지 모르겠다. 한데 야권 분열사는 너무 흔한 드라마라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경구가 들어맞고 있지 않은가. 야당과 달리 국정을 운영하는 집권당은 그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 통합이 아닌 분열로 정당민주주의를 수십년 후퇴시키고 국민에게 절망을 안겨준 데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사건을 해결하고 다시 공존사회를 만든 주인공 토끼는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변화의 시작은 바로 ‘당신’과 ‘나’라고. 오늘은 총선 사상 처음 도입된 사전투표를 하는 첫날이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이다. 유권자의 힘을 보여줄 때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