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밥 한 끼-정재준] ‘소년 집배원’을 위로해준 잡곡밥

입력 2016-04-07 18:50 수정 2016-04-07 21:46
12살까지 똘망하고 천진한 소년으로 지내던 나에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정미업을 하시던 부친이 세상을 뜨시자, 한 순간에 나는 병약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하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50∼60년 전, 가진 것 없는 시골에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어린 내게는 적이 벅찼다. 그래도 불평은 하지 않았다.

나는 독학을 하며 배움을 놓지 않았다. 낮에 일하고 밤이면 한자를 익혔다. 작은누나가 도시로 취업해 떠나면서 두고 간 영어사전을 암송하기도 했다. 외가동네로 이사한 집이 학교와 가까운 것을 활용해 구멍가게를 차릴 요량으로 왕복 8km 거리의 읍에 나가 아이스케끼 장사를 했다. 이 장사로 번 600원이 구멍가게를 여는 밑천이 되었다. 이 돈으로 읍 도매상에서 1원에 2개씩 파는 젤리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이렇게 시작된 구멍가게는 6개월이 지나면서 문구류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즈음 면 우체국장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며칠 전 봄소풍을 떠나는 학생들 뒤에 나무상자 좌판을 매고 따라가는 네 모습을 보았다”하시면서 “우체국 집배원이 되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가게를 접기로 했다. 새로 시작하는 집배원 일이 독학을 하는 나에게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서다.

평야와 산악지대가 번갈아 이어지는 면 일대를 종일 걸어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은 16살 소년에게는 벅찬 노동이었다. 밤이면 종아리에 쥐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깨곤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나의 종아리는 튼튼한 근육질이 되었다. 지금까지 전도를 하고 지구촌을 다니면서 감기약 한 번 먹지 않은 것은 그때 다져진 종아리 근육 덕분이라 여긴다.

그뿐인가. 집배원생활을 하는 이 기간 동안 나는 평생 갚지 못할 ‘사랑의 빚’을 졌다. 월남전 파병으로 인해 시골마을에도 우편물이 많았던 그 무렵, 나에게 할당된 두툼한 우편뭉치를 들고 가가호호를 돌다 보면, 한 겨울에도 이마에서 땀이 맺히고 뱃속에선 금세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여름이면 땀으로 흥건히 젖은 내게 시원한 우물물에 말아준 보리밥 한 상. “젊은 청년이 수고한다”며 어깨를 다독여주던 아저씨 누나 형들의 격려. 그 따스한 기억 중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삽화’ 하나가 있다.

눈보라를 헤치며 산속 외딴 집을 방문했을 때다. “편지요. 월남(베트남)에서 온 편지입니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면서 나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청년! 춥고 배고플 텐데, 어여 들어와요. 밥상 차려 놓았으니 먹고 가.” 준비한 잡곡밥과 구운 고구마를 맛있게 먹는 나를 보시면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청년은 이담에 엄청 잘 살 것 같어” 하시며 격려해주시던 할머니의 이 한 마디는 내게 혹한의 추위를 녹였다.

그때 다짐했다. 나도 어른이 돼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상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리라. 그 결심이 NGO단체를 섬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돌이켜 보면 십수 ㎞씩 걷던 나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신 할머니와 아주머니들. 중학교 전과와 문학전집을 빌려주셨던 형과 누나들. 낱낱이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나, 그분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주신 천사였다.

정재준 글로벌 NGO 굿파트너즈 대표

약력=△법원행정고시 합격 △우리법무사 대표 △CBMC 시화지회장 △안산동산교회 장로 △글로벌 NGO 굿파트너즈 대표 △저서 ‘일요일엔 뭐하세요’ ‘황금대화법’ ‘VIP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