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선거판이다. TV방송에는 국회의원 선거일을 알리는 디데이(D-day) 표시까지 등장했다. 신문 헤드라인은 연일 여론조사 결과로 도배된다. 수치와 데이터를 보고 있자면 씁쓸하다. 이 수치와 전망은 진정 우리들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일까.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했는데, 이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대부분 ‘전쟁 용어’다. 빛깔도, 향기도 없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아야 한다. 그런데 생명이 없다. 때문에 민주주의의 꽃은 조화(造花)가 돼버렸다.
선거 때마다 접하는 구호들은 별반 다르지 않다. 심판이라는 말은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다. 백팔배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장면도 연출된다. 정치는 부끄러움도 없다. 집에 도착한 선거 인쇄물을 펼치면 ‘이걸 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진정, 한국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로 꽃피고 있는 것일까.’ 실패와 퇴행으로 얼룩진 안보 정치 외교 사회 경제 문화적 현실을 덮어주는 면죄부, 또는 4∼5년마다 한 번씩 눈 딱 감고 낙제생을 우등생으로 바꿔주는 절차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피곤하다. 정치인을 보는 일도, 선거 한 번으로 나라가 바뀔 듯 시끄럽고 요란한 쟁투와 분열도. 이를 뒤쫓는 언론까지 한몫 더한다. 사회는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다양성이 키워드가 됐는데 정치는 같은 색깔의 점퍼, 심지어 신발까지 맞춰 색깔 마케팅으로 집단적 선명성만 드러내려 한다. 체념이 든다.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인가. 벨기에 문화사회학자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그의 책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에서 바로 이 ‘피로감의 원인이 선거’라고 단언했다.
투표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판단으로 정치의 약점과 오점을 메울 ‘동시대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무엇보다 먼저 ‘미래세대를 위한 선택’이 되게 하자.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미래세대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미성년자여서 현 세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현 세대의 정책에 영향을 받는 세대’라고 정의한다. 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이전 세대가 물려주는 사회경제적 물리적 문화적 유산을 무조건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든, 사표(死票)가 되던 선택의 결과는 미래를 가늠하는 표지가 될 것이다.
지역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선심성 공약을 걸러내자. 입으로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라고 외치는 수사(修辭)를 경계하자. 쏟아져 나오는 여론조사 수치에도 집착하지 말자. 선거란 어차피 한 명의 당선자와 여러 명의 낙선자를 동시에 낳는 절차가 아니던가. 해서 우리의 참여와 관심이 그 하나의 당선자로 하여금 여러 낙선자를 지지했던 유권자의 의사도 존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책임’을 덧붙이고 싶다. 성서는 ‘위로부터 온 권세에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류의 성경말씀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허나 이는 ‘굴종’을 강요하는 말씀이 아니다. 어떤 결과든 합의된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되, 결과를 산출하기까지는 최선을 다해 자기 의사를 반영하고, 건강하고 참된 방향을 끌어내기 위한 용기와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b).”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을 주관하신다. 필요할 때엔 적국의 왕까지 사용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 권능은 주님께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실행은 사람을 통하신다. 결과는 ‘주님주의’지만 과정은 ‘민주주의’다. 기독교인에게 선거는 복종해야 할 권세가 아니라, 따르고 싶은 지도력을 세우는 일이다. 사회적 구원과 은총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선포해야 할 더 막중한 사명과 함께 말이다.
며칠 뒤면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았고, 눈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의 이름 아래 붓두껍을 눌러야 한다. 하지만 그 행위 속엔 언제나 그랬듯, 희망과 기대뿐 아니라 잔혹동화 같은 세태와 그 속에서 사람들이 흘린 눈물, 우리의 분노와 원망도 함께 담겨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주권이다.
손성호 목사 (서울 초동교회)
[시온의 소리-손성호] 투표합시다, 우리의 주권입니다
입력 2016-04-07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