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굴려져 나간 것을 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혹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는 않았는지 당황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 말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놀란 여자들이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렸으나, 사도들은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말 사전에 따르면 ‘어처구니’는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의미하는데, 주로 ‘없다’의 앞에 놓여 ‘어처구니없다’는 말은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여자들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았던 유대 사회의 전통은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어원은 모르지만 설에 의하면 어처구니는 맷돌의 손잡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궁궐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세워진 잡상(雜像) 또는 작은 토우를 말하는데, 이 토우들은 액운을 막고 악귀나 요괴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처구니가 없으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맷돌을 갈지 못하면 맛있는 두부도 만들 수 없고, 어처구니가 없으면 악귀를 쫓아내지도 못할 것이니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산 사람들이 테러로 무차별적으로 죽어가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 아닐까요?
세월호 사고 2주년이 되어가도 왜 295명의 어린 생명들이 죽었고, 9명이 실종되었는지 지금도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 아닐까요?
지구 전체 인구의 6분의 1, 그러니까 10억명의 사람들이 하루 평균 1달러로 살고 있는 것은(2014년 현재) 어처구니없는 일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나라 음식물 쓰레기가 연간 500만t 이상 발생하고, 이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연간 9000억원이 든다고 하니 이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음식물의 수입, 유통, 요리 등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기후변화 문제를 감안하면 연간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20조원을 넘는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어처구니없는 일 아닐까요?
그런데 다른 어처구니도 있습니다. 이 어처구니가 없이는 맷돌을 갈 수도 없고, 악귀를 쫓아내지도 못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말, 죽은 자의 부활 없이는 죽음이 극복되지 않고,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삶의 모순인 죄 안에서의 죽음은 부활을 통해 극복되고, 부활은 죽어야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 세상’(죽임의 현실)에서 ‘어처구니없는 말’(부활의 미래)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억울하게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부활이라는 어처구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채수일] 어처구니없는 말
입력 2016-04-07 1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