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이 열심히 일하며 살아보겠다고 관청의 정식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건축을 하려는 데도 지역주민들은 무조건 반대부터 했다. 공사도 하지 말고 아예 오지도 말라며 길에 드러누워 버렸다. 참 어이가 없었다.
우리 사회가 집단 이기주의가 심하다고 하지만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에 도움을 요청해 주민들을 말리러 온 공무원이 얻어맞아 얼굴을 다치고 돌아갔다. 주민들은 다른 대책도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장애인 복지시설 5곳이 공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곳이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관청에서는 민원이 발생하면 알아서 해결하라고 방관을 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구 부구청장은 길에 누운 사람을 업무방해로 경찰에 연행까지 시키며 우리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몇 번이나 우여곡절을 겪은 후 간신히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증개축 공장 및 기숙사가 완공됐다. 이곳이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살아도 되는 우리 공장이라고 생각하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우리는 이사를 하고 집을 짓느라 은행에 빚이 많았다.
빨리 열심히 일해 갚아야 하는데 갑자기 경기가 나빠지면서 일거리가 또 뚝 끊겨 버렸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구로공단을 돌고 돌아도 일감이 없다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 경제가 저금리 저유가 저환율에 힘입어 고속성장을 하다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었다. 우리 같은 전자부품 조립업체 타격이 제일 컸다.
자연히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하게 되고 은행은 가차 없이 공장과 땅을 경매에 부쳤다. 원생들 월급도 밀려 원망도 쌓였겠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아 고마웠다. 이로 인해 싸우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떠나는 친구도 없었다.
“주님. 우리 현실 아시죠. 이 어려움을 이길 힘과 용기, 지혜를 주세요. 경매가 낙찰되면 우린 이제 모두 뿔뿔이 흩어져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그런데 순간 “경기에 민감한 부품조립만 하지 말고 업종을 바꾸면 어떨까”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다. 직원들을 모은 뒤 우리가 다른 일을 해보자며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했더니 빵을 만들어 팔자거나 신발 제작 하청업으로 돌리자거나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쇼핑봉투를 풀로 붙이거나 와이셔츠 상자를 접는 일 등은 일거리는 있었지만 노동에 비해 인건비가 너무 싸 제외시켰다. 그런데 한 직원이 갑자기 ‘비닐봉투’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비닐봉투는 모든 시장에서 또 가게에서 다 사용합니다. 만드는 곳도 많지만 그만큼 수요도 많습니다. 가격은 싸겠지만 장애인이 만들었다고 무시하거나 안 사주는 품목은 아닐 것입니다.”
시장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시장성은 있는데 초기 비닐봉투 제조기계 값이 너무 비쌌다. 직접 가보니 요즘은 공장이 자동화돼 비닐원료만 사다 부으면 비닐봉투가 저절로 제작돼 손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마무리 공정도 단순해 우리 원생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과감히 업종을 변경했다. 시설투자를 위해 또 대출을 받았다. 다행히 재래식 기계를 싸게 판다는 한 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달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989년 12월 압출성형기 2대와 인쇄기 2대, 가공기 5대가 우리 공장에 설치됐다. 엄청난 모험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정덕환 <10> 눈치 안보고 일할 우리들의 공장·기숙사 완공
입력 2016-04-05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