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때 양민 살린 ‘한국판 쉰들러’… 모슬포교회 故 조남수 목사 화해 사역 재조명

입력 2016-04-03 18:05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교회는 1948년 4월 3일 이후 전개된 비극 속에서 화해의 역할을 수행하며 4·3사건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도왔다.
모슬포교회 故 조남수 목사
제주 4·3 사건이 3일로 68돌을 맞이한 가운데 당시 서귀포의 모슬포교회를 담임하던 조남수(1914∼1997·사진) 목사의 화해를 위한 사역이 다시 조명 받고 있다.

4·3 사건은 1947년 3월 제주도에서 좌익세력이 일으킨 무장봉기에 대해 48년 4월 3일 미군정 하의 경찰과 극우세력이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사건은 54년 9월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공식 희생자만 3만 명이 넘으며 최근엔 관련 희생자가 4000명이나 새롭게 판명되는 등 비극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다. 당시 교회들도 피해가 커서 이도종(대정교회) 목사가 순교하는 등 17명의 기독교인이 희생됐다.

그런 제주도민들에게 조 목사는 잊지 못할 인물이다. 48년 10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산악지대 등에 대한 통행금지가 실시됐고, 이를 어기면 폭도로 간주해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11월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이 대대적으로 전개돼 마을의 95% 이상이 초토화 됐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가족 중 젊은 사람이 없어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부르며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했다. 재판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 사살하기도 했다.

당시 입산한 무장대들에게 가족들은 쌀과 돈, 옷과 양말을 내줬다. 대부분 선량한 주민들이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고백하고 자수해도 죽임을 당할 것이라 두려워했다. 이때 조 목사가 자수를 권고하는 강연에 뛰어들었다. 48년 11월 25일이었다. 조 목사는 모슬포경찰서 서장 문형순으로부터 자수자에 대해서는 죄의 유무를 불문에 붙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자수 선무 강연’을 시작했다.

조 목사는 강연회에서 “나는 기독교 목사입니다. 나를 믿고 자수할 사람은 따르시오”라고 호소했다. 첫 강연에서 100여명이 자수를 하고 처형을 면하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이후 한림 화순 중문 서귀포 지역 등에서 총 150회에 걸쳐 강연을 했다. 그 결과 3000여 명이 자수함으로써 희생을 면할 수 있었다. 한국판 ‘쉰들러(제2차 세계대전 중 많은 유태인의 생명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가 된 것이다.

‘화해자’ 조 목사의 사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신원보증에 나섰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형 위기에 몰렸던 200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1949년 3월 모슬포교회는 특별 전도강연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선 조 목사의 신원보증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모슬포교회는 4·3사건 희생자와 교인들의 장례비와 조위금, 구제비를 전달했다. 당시 모슬포교회 교인들도 6명이 희생됐다.

모슬포교회는 산남(한라산 남쪽) 지역 최초의 교회로 1909년 제주 선교사 이기풍 목사가 설립했다. 지금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으로 제주에서 가장 많은 사료를 보유하고 있다. 옛 교회당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제주 기독교 순례길 3코스인 ‘사명의 길’에 위치해 있다.

손재운 모슬포교회 목사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던 상황에서 조남수 목사는 기꺼이 화해자가 되어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며 “요즘은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참다운 화해를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조 목사님의 정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귀포=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