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사소한 언쟁에도 아이는 불안감과 공포를…아, 앞부분 대사를 빼 먹었군요. 죄송합니다.”
2일 오후 서울가정법원 청연재에서 열린 연극 ‘여보, 고마워’ 오디션 현장. 심사위원 5명 앞에서 대사를 읊던 서울서부지법 남현(41) 판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신 노래 한번 해보겠습니다.” 남 판사가 록그룹 부활의 히트곡 ‘사랑할수록’을 열창하자 심사위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 달 공연을 앞둔 연극 ‘여보, 고마워’는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가 뜻하지 않은 남편의 병마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정을 회복한다는 내용이다. 전국 가사 담당 판사·가사조사관 310명이 모인 대법원 부모교육연구회는 ‘이 연극에 현직 판사들이 출연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연구회가 낸 ‘오디션 공고’를 보고 전국에서 판사 8명이 모였다. 연구회 간사인 신순영(37) 판사는 “딱 한 분이라도 참여하시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이 모였다”며 활짝 웃었다.
판사는 대한민국에서 바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직업이다. 재판에 쫓기며 야근에 시달리는 이들이 연극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천가정법원 이대로(35) 판사는 “판사생활 9년차인 올해 처음 가사재판을 맡게 됐다”며 “‘가정’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창원지법 통영지원 정혜승(30) 판사도 “이혼 당사자들의 사정을 연극을 통해 이해하고 싶었다”고 했다.
연기는 남 몰래 품어온 꿈이기도 했다. 남 판사는 “원래 꿈은 라디오 연기였는데, 취미로 하긴 어려웠다”며 “학창시절 거울을 보며 연기 연습을 하곤 했다. 올해는 꼭 무대에서 그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오디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직장인 연극 동호회에 가입해서라도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의정부지법 이화용(49) 부장판사는 “호기심에 참여했다”고 말해 심사위원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이 부장판사는 “유명 배우도 연극 무대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대체 무대라는 게 뭘까, 저는 그게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법조인 최초로 금융정보분석원(FIU)에서 근무했던 판사이기도 하다.
가장 유력한 선발 후보는 다수의 연기 경력을 보유한 수원지법 평택지원 김용희(37) 판사였다. 김 판사는 2006년 연극 ‘미라클’로 강원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그의 연기에 심사위원들은 “채플린을 보는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인천가정법원 이수주(33) 판사는 중국어로 아동극 연기를 선보였다. 서울가정법원 박건창(37) 판사는 트로트곡 ‘무조건’을 휘파람으로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 수원지법 평택지원 정은영(37) 판사는 김광규 시인의 ‘생각의 사이’를 낭송했다. “(일부 생략)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법과 전쟁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에겐 다만/ 형무소만 남을 뿐이다.”
연극 대본을 쓴 고혜정(48·여) 작가는 “처음엔 판사들이 이혼 문제를 문화적으로 접근해 이혼율을 낮추고 싶어 한다는 것에 놀랐다”며 “지금은 지원한 판사 8명 모두와 함께 공연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보, 고마워’는 5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서울 문화일보홀에서 공연한다. 법원은 협의이혼을 앞둔 부부에게 관람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글·사진=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연극 오디션 본 판사 8명… “가정 소중함 알렸으면”
입력 2016-04-03 19:36 수정 2016-04-03 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