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지역 커뮤니티 속으로”… 중견 연출가 5인, 脫대학로 실험

입력 2016-04-03 19:38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중견 연출가 양정웅, 임형택, 임도완, 조광화, 오경택(왼쪽부터). 이들은 “상업화에 물든 대학로를 떠나 인근 성북구에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임도완(57) 임형택(53) 조광화(51) 양정웅(48) 오경택(43). 한국 연극계 중견 연출가 5명이 상업화가 심각한 대학로를 떠나 인근 성북동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성북동 큰길 프로젝트’로 뭉친 이들은 극단 연습실을 극장의 대안공간으로 활용하는 한편 지역 주민을 상대로 시민연극교실을 열 계획이다. 최근 젊은 연극인들이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오른 대학로를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비중 있는 연출가 겸 연극과 교수들이 이 대열에 합류한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달 31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 모인 이들 5인방은 “오락가락하는 공공 지원과 대학로의 상업화 속에서 순수 연극의 존재방식과 극단의 생존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 위해 뭉쳤다”면서 “대학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를 좀 더 공론화시키는 한편 우리 연극인들이 지역으로 밀착해 들어가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이들은 지난해 임도완(서울예대 교수)이 탈 대학로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지역 예술가와 주민들이 어우러진 ‘예술 마을’ 공동체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성북구와 성북문화재단이 이들 모임에 지원을 표명하면서 프로젝트가 빠르게 구체화됐다. 조광화(서울예대 교수)는 “그동안 극단을 만들지 않은 채 제작사들과 작업해 왔지만 최근 창작자로서 작업 방식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며 “성북동 큰길 프로젝트가 나를 포함해 창작자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임도완이 이끄는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소극장 돌려막기 프로젝트’가 개막되면서 성북동 큰길 프로젝트는 본격 시작됐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성북동 경신중학교 후문 부근의 연습실에서 대표작 ‘굴레방다리의 소극’을 시작으로 연간 7편을 선보인다. 티켓을 파는 대신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후원금을 받는 방식이다. 임도완은 “연극의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가난한 연극’ 운동에 공감하는 관객들로 첫날부터 연습실이 꽉 찼다”고 전했다.

극단 여행자를 이끄는 양정웅(서울예대 교수)도 한성대입구역 인근 연습실을 개보수한 뒤 6, 7월부터 젊은 연극인들의 작품을 릴레이 공연할 예정이다. 이들 5명은 성북문화재단의 후원 아래 하반기 시작되는 시민연극교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단순히 공연을 한 번 올리고 끝나는 기존 시민연극이 아니라 시민극단까지 만드는 것을 목표로 3개년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특히 성북구 내의 유휴시설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양정웅은 “요즘 연극계의 패러다임이 전통적인 극장을 벗어나 지역 커뮤니티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정형화된 창작을 벗어나게 되면서 어쩌면 연극의 본질이나 창의성이 더 잘 드러날지도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오경택(중앙대 교수)도 “우리와 비슷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젊은 연극인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성북구 안의 연극인은 물론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자연스럽게 연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북구는 예전부터 대학로 배후지로서 연극인들이 많이 거주할 뿐만 아니라 극단의 연습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최근 성북구와 성북문화재단이 문화예술을 통한 지역 재생 전략을 추진하면서 연극인들이 더욱 몰려들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부터 성북문화재단은 지역 연극인, 기획자, 주민들과 함께 돈암동의 미아리고개예술극장(구 아리랑예술극장)을 마을극장으로 만드는 것을 추진 중이다. 권석린 연극연구소 명랑거울대표 등 젊은 연극인들 수십 명이 참여한 협동조합이 조만간 출범해 이 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여기에 서울시가 한성대입구역 인근 2760㎡에 소극장, 연습실, 연극인 레지던스 등이 들어가는 연극종합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서 연극인들의 성북구행은 계속될 전망이다.

임형택(서울예대 교수)은 “최근 대학로로 상징되는 연극계는 시스템이나 생태계가 거의 망가졌다. 연극인이라면 하나같이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다”면서 “다만 궁상맞지 않고 즐겁게 연극을 하고 싶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다른 연극인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