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여 전 ‘노예 매춘’의 야만성을 드러낸 사건이 발생했다. 2000년 9월 19일 전북 군산시 대명동의 속칭 ‘쉬파리골목’ 윤락업소 2층에서 불이 나 잠자던 여종업원 5명이 질식사했다. 창문에는 도주 방지용 쇠창살이 달려 있었고, 유일한 출입구인 1층 문은 이중구조에다 밖에서 잠글 수 있도록 돼 있었다.
홍등의 뒤편에 감금과 폭행, 강요 등의 성(性) 착취가 도사리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때껏 우리 사회가 모른 척했거나 잊고 있었던 성매매의 범죄성이 분노를 타고 다시 떠올랐다.
그 결과가 2004년 9월 성매매특별법 시행이다. 1961년 군사정권 때 제정됐으나 제구실을 못하던 윤락행위방지법은 폐지됐다. ‘여자가 타락해 몸을 파는 처지에 빠짐’이란 뜻의 윤락은 성매매란 가치중립적 용어로 바뀌었다.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미아리 텍사스촌’의 한 종업원은 “당신들 딸처럼 좋은 환경에 태어났다면 여기 있지 않았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기도했다. 전국 12개 집창촌의 성매매 여성 3000여명은 국회 앞에서 생존권 보장 시위를 했다. 이들은 북과 징을 치며 ‘아침이슬’을 불렀다.
이후 12년. 성매매를 법으로 가둘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계속해 논란 안에 있어 왔다. “오늘날 성매매는 더욱 음지를 향해 갔고, 더욱 게걸스러워졌다”는 혹평도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최근 이 법이 합헌이라고 재확인했다. 9인의 재판관은 성매매 근절이라는 도덕적 이상과 성매매 현실의 간극에서 고심했을 터다.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성매매가 법과 단속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그럼에도 11개월 전 간통죄에 위헌을 선고한 헌재가 성매매 처벌은 온당하다고 본 건 ‘인간의 성이 시장의 사고파는 물건처럼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통고였다. 그러니 혹여 성욕이 분출되는 때라도 잊지 마시라. 성매매특별법은 살아 있다는 걸.
지호일 차장 blue51@kmib.co.kr
[한마당-지호일] 성매매
입력 2016-04-03 17:22 수정 2016-04-03 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