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어질어질한 봄, 봄. 동네 뒤로 이어지는 북한산을 오르노라면 샛노란 개나리가 반겨 주고, 좁은 돌계단 틈 사이사이에서 보랏빛 제비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조금 더 오르면 여기저기 진달래 무더기가 산을 밝히며 내 가슴까지 진한 분홍색으로 물들인다.
진달래는 내게 곧 화전(花煎)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선병질적인 남편의 외면 속에 쓸쓸히 별당을 지키던 여인은 깊은 눈빛을 지닌 다감한 사내 환이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지리산으로 숨어든 동학군 환이의 출생의 비밀을 한 꺼풀 벗기면 별당아씨는 바로 그의 형수가 된다. 어미를 찾는 서희의 울음소리가 지리산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여인을 흔들고, 그녀는 시름시름 넋을 놓는다. “진달래꽃이 피면 당신에게 화전을 부쳐 주고 싶었는데….” 여인은 사내의 품에 안겨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떨어뜨린다.
봄이다. 산과 들로 발길을 잡아끄는 봄, 봄. 봄날의 산과 들은 내게 곧 나물바구니다. 고색창연한 성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에는 민들레, 참나물, 명이, 달래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밭에서 재배한 것만 채소로 취급하고 야생은 거의 먹지 않는다. 독일 유학시절, 엄마의 나물 반찬에 길들여진 내게 그 들판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나물들은 나의 향수를 달래 주고, 가난한 유학생 가족의 밥상을 도왔다.
하루는 미군부대 마당이 냉이 군락지라는 첩보(?)를 듣고 이웃의 한국 유학생 가족과 그곳에 잠입했다. 와! 한국 것보다 훨씬 큰 냉이들이 뒷마당 가득 자라고 있는 장관이라니! 굵직굵직한 냉이 뿌리에 매혹당해 열심히 캐고 있는데, 아뿔싸! 미군 헌병이 총을 들고 다가오는 게 아닌가. 우리는 얼른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라 캐는 거라고 둘러댔다. “그래? 그거 뽑아 주면 잔디에 좋겠네. 예스, 오케이.” 삶아서 냉동고에 넣은 그 냉이는 일년 내내 봄날을 선물했다. 지금도 나는 산과 들에 나가면 먹을 수 있는 나물이 뭐가 있나 그것부터 살핀다. 서울내기가 어떻게 그리 잘 아냐는 감탄을 은근 즐기며….
봄이다, 수런수런한 봄, 봄. 화사한 봄볕을 쬐며 수런수런하느라 배고픈 이들과 더불어 화전과 갖가지 봄나물로 거방진 밥상을 차리고픈 봄이다!
오래 전, 음식에 담긴 추억을 주제로 하는 책을 기획한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소설가 공선옥은 어린 시절 고향의 들판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고 설익은 곡식 나락을 훑어먹던 배고픔을 이야기했다. 화가 정은미는 웬만한 집에서는 구경조차 못했던 새알 초콜릿을 벽장에 쟁여 두고 먹었다고 한다. 두 사람과 비슷한 또래의 나는 도시 소시민 가정의 셋째 딸이다. 우리 집은 살림이 소박했지만 먹는 걸로 자식들 포한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엄마 덕분에 가마솥 가득 찌는 감자와 달걀, 과수원에서 광주리째 이고 오는 과일 등으로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세 여자는 요즘 유행어로 치면 흙수저, 금수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건가? 그렇다면 우리 셋의 인생은 어떠한가? 다른 밥상을 받으며 다르게 세상을 살았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념을 길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절대수저도, 절대반지도 없다. 절대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약력=△한길사·김영사 편집장 역임 △현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출판실 실장 △서평가 △서울 홍은성결교회
강옥순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따뜻한 밥 한 끼-강옥순] 진달래 화전, 봄나물 밥상
입력 2016-04-03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