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덕환 <9> 일거리 늘면서 에덴복지원 80여명 대식구로

입력 2016-04-04 19:05
경기도 파주 ㈜형원 공장에서 정덕환 장로와 직원들이 함께했다. 오른쪽 두 번째가 홍성규 사장, 왼쪽 두 번째가 박대성 팀장이다.

노숙을 하게 돼버린 에덴복지원생들을 위해 구청이며 은행이며 찾아가 하소연했다. 우리가 노숙하는 모습을 본 은행 측이 불쌍해서였는지 단 한 달이라는 조건 하에 다시 지하공장에 들어가 지내도록 허락해 주었다.

난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백방으로 우리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고 간신히 은행 대출을 받아 허름한 단독 2층집을 구했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기숙사로 꾸몄다. 월세지만 좋은 장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무렵 하나님은 내게 두 명의 귀한 일꾼을 보내주셨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개인의 능력과 달란트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내게 꼭 필요한 분과 때맞춰 손잡게 해주신 것이다.

한 분은 우리 공장 근처에서 공무원시험 공부를 하다 나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찾아온 홍성규씨로 지금 우리 계열 공장인 주식회사 ‘형원’ 사장을 맡고 있다. 그도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지만 특유의 온화함과 탁월한 영업능력으로 오늘의 에덴복지재단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와 일한 지 벌써 30년이 넘는다. 또 한 분은 손가락 8개를 잃은, 철원 사는 여성 한 분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신도 무엇인가 의욕적으로 일하고 싶은데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강원도를 가는 길에 그녀를 직접 만나보게 되었다.

표정이 밝고 두 손가락으로도 뭐든 잘한다고 해 서울로 데려와 사무실 일을 맡겼다. 그녀 역시 지금까지 회사의 모든 공문과 업무를 척척 잘 해내는 일꾼으로 나의 수족이 되어 도움을 주고 있다. 바로 박대성 팀장이다.

어려움을 지난 우리 에덴복지원은 마침 수출이 활성화되는 경제개발 붐을 타고 일거리가 점점 많아지는 특수를 누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일했다. 거의가 휠체어에 앉아 일했는데 등에 땀띠가 나고 엉덩이에 종창이 생겨도 아픈 줄 모르고 일했다.

이제 일거리가 많아지니 일하고 싶어하는 장애인을 더 고용했고 80여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우리는 바쁜 가운데도 틈틈이 모여 휴식하며 찬양을 불렀고 우리끼리 일하고 번 돈으로 자립하고 월급까지 줄 수 있어 모두가 행복했다.

평생 장애인 자녀를 부담으로 안고 살던 부모들은 월급까지 주는 나를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나는 수입을 정확히 분배해 일한 만큼 나누려고 노력했다.

또 한바탕 큰 심술이 에덴복지원에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1987년 여름, 태풍 셀마가 북상하면서 비바람을 몰고 왔고 우리 공장 낡은 건물 옆 하수구가 역류하면서 공장 1층이 모두 물에 잠기는 수해를 만난 것이다.

기숙사가 2층인 것이 다행이었다. 나와 직원들은 모두 인근 교회로 대피했고 부품과 작업용품, 기계가 유실돼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우리의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싱마다 황토흙이 들러붙어 태반을 버려야 했다.

“여러분,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그동안 고난을 딛고 일어설 때마다 주님은 우릴 더 크게 성장케 해 주셨습니다.”

이 홍수를 계기로 서울 개봉동에 땅 230평을 사서 직접 에덴복지원 시설을 짓기로 했다. 빚을 내어 땅을 산 뒤 구청의 도움을 받아 기존의 건물을 개축해 사용키로 했다.

그런데 장애인 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번엔 주민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지역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면 집값에 영향을 주고 자녀교육에도 안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민들은 ‘우리 아이는 우리가 지킨다’란 현수막도 걸어 나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