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의원에 가서 손목을 잡혔다. 세월의 주름이 얼굴에 깊게 진 노의원은 맥을 짚다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눈물이 많지?” “한숨을 자주 쉬지?” 딱히 별스런 말이 아니었는데 그만 그 물음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살다 보면 그렇게 맥락도 없이 눈물 떨구는 날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왜 맥락이 없겠나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음을 들키고는 나 자신조차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때가 있다.
며칠 전이었다. 회사에서 맡고 있는 지원사업 관련 사업운영 지침에 예산편성집행 지침을 만들다가 인쇄·홍보물 제작비를 인내·홍보물 제작비라고 타이핑한 오타를 발견하고는 ‘인쇄를 인내라고 타이핑한 내 실수가 과연 실수이기만 한가’라는 복잡 미묘한 생각에 사로잡혀 한참을 모니터를 멍청하게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모니터에 타이핑된 것에 조금 당황했달까, 아무튼 참을 인(忍) 백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여러 날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돌아와 마음을 가다듬고 모니터 앞에 앉아 오타를 수정하려고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인내·홍보물 제작비가 아니라 안내·홍보물 제작비라고 적혀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원래 안내라고 적혀있었던 것을 한 번은 인내로 읽었고 한 번은 인쇄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무안해져 헛헛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 자신조차 나를 모를 때가 부지기수로 많은 채 우리는 바쁘게 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나도 모르게 나를 잃어버리며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 와중에 안내를 인내로 오독하게 되도록 내가 참았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필시 그 노의원은 정확하게 알아차린 게 분명하다. “맥이 고르지 않네” “기가 막혔어”도 아니고 “눈물이 많지?” “한숨을 자주 쉬지?”라고 용케 물어주셨으니.
안현미(시인)
[살며 사랑하며-안현미] 老 의원
입력 2016-04-03 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