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 류이치 전 중의원의 77년 생애를 이야기하려면 한국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약학전문학교를 나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1939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동대문국민학교 시절, 조용하던 성격의 그는 조선말을 쓰는 아이들을 괴롭히던 일본학생들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일본이 패전한 뒤 47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반대로 ‘식민지의 아들’ ‘고향 없는 사람’이라며 ‘이지메(따돌림)’를 당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겼고 때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그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했다.
고베에서 사회복지사업을 할 때도 재일한국인들을 많이 도운 것으로 전해졌다. 90년 2월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뒤 민주당으로 옮겨 활동을 했다.
97년 2월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영진 전 농림부장관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뒤바꿔 놨다. 김 전 장관이 일본 강제징용 노무자의 아들이었다며 자신의 사연을 고백하자, 도이 전 의원이 눈물을 흘리며 대신 사과했다는 일화는 큰 화제가 됐다.
도이 전 의원은 이후 ‘PPP십자가대행진’, 3·1절 기념예배와 8·15광복절 기념예배 등에 참석하며 꾸준히 교류 활동을 펼쳤다.
2011년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3·1절 예배는 그의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판하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게 화근이 됐다.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보수 언론과 우익들이 매국행위라고 매도하고 나선 것이다. 가족을 헤치겠다는 협박 등에 못 이겨 결국 그는 당직은 물론 의원직까지 포기했다.
그는 지난해 4월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기 전까지 바쁜 정치 활동 중에도 늘 자신이 세운 복지시설의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했다고 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피해현장에서 미국 빌리그레이엄재단이 보내온 지원물자의 배급을 돕는 등 섬김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화해·용서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살았던 정치인이자 목회자였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 평화주의자였다.
도쿄=김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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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4-03 17:32 수정 2016-04-03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