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만 모여 일하는 에덴복지원은 인원이 늘어나면서 문제도 많이 일어났다. 중증장애인이 많아 수시로 병원으로 실려가는가 하면 일거리가 떨어지고 수입이 줄면 금방 식량도 떨어져 나를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이셨다.
우리가 매일 아침 모여 드리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기 때문이다. 추위에 겨울 날 일을 걱정하고 있으면 독지가가 나타나 보일러를 놔주었고 쌀이 떨어질 때가 되면 누군가 쌀가마를 갖다 놓았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장애인들이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는 단순한 일감만 받아야 했고 그러니 수공비도 작았다. 그나마 경기가 안 좋으면 일감이 떨어져 원생들이 두 손을 놓고 있어야 했다. 내가 주로 일감을 따와야 했기에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의 비밀’을 깨달았다.
일감이 떨어지면 전 원생이 뜨겁게 ‘일감을 달라’고 합심해 기도하고 나가면 이름도 모르는 분이 찾아오거니 좋은 분을 우연히 만나게 돼 ‘일감’이 생기곤 했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처럼 ‘뚝’하고 떨어졌다.
에덴복지원은 원생이 점점 늘어 40여명이 되었다. 당시 장애인만 고용해 이 정도 규모를 가진 곳은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가 체험한, 그리스도 복음을 통한 삶의 의미와 감사를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예배와 수요예배, 주일예배를 드리고 저녁에도 기도회를 가졌다.
“여러분. 우리가 지내는 이곳이 협소하고 일도 힘들고 불편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매사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바로 이곳이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과 뜻이 있음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기도합시다.”
모든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하고 판단하고 처리하려니 너무 힘든 부분도 있었다. 이럴 때마다 장애인공동체 에덴복지원을 만들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걸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미국에 계신 형님이 주선해 장애인재활 공부를 할 수 있는 미국의 학교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유학 대신 장애인과 함께 살 것을 선택했다.
빨랫감만 잔뜩 갖고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와 얼굴만 비치는 나를 그나마 아내가 이해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장애인을 돌본다는 것을 아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지에만 있던 장애인들이 모여 일을 한다니 매스컴에서 앞 다투어 우리 에덴복지원을 보도했다. 당시 인기 TV프로였던 ‘11시에 만납시다’란 토크 프로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분장실에 도착해 녹화를 준비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원장님. 큰일 났어요. 이 건물이 사흘 후 철거되니 우리가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대요.”
건물주인이 부도를 내어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보증금도 없이 쫓겨날 신세가 될 줄 몰랐다. 이 많은 인원이 이제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앞이 캄캄했다. 녹화를 마치고 돌아와 대책을 논의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사흘 후 정말 집달관이 철거반 20여명을 데리고 와 우리가 쓰던 모든 집기와 살림, 기계를 밖으로 들어냈다. 4월이었지만 밤공기는 차가왔다. 우린 피란민처럼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해 나눠먹은 뒤 길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하나님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정덕환 <8> 장애인들 삶의 터전 ‘에덴복지원’서 쫓겨나
입력 2016-04-03 18:12 수정 2016-04-03 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