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내 절반도 못살았어요. 난 중요한 작품을 하고 있는 오늘의 작가예요. 옛날 사람 이중섭 얘긴 안하고 싶어요. 자꾸 나랑 엮으려 하는데….”
지난달 말,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작업실. 이중섭에 대해 묻자 싫은 내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그를 찾아온 많은 이들이 살아있는 그의 입을 통해 요절 작가 이중섭에 대해 알고자 했다. 100세 화가 김병기,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산증인이며 이중섭의 증인이이기 때문이다.
김병기와 이중섭. 우린 이중섭은 알아도 김병기는 잘 모른다. 비슷한 길을 걸어왔으나 생의 후반부가 극적으로 갈렸기 때문이다.
똑같이 평양 지역에서 1916년 태어났다. 소학교 6년 내내 같은 반 ‘절친’이었다. 같이 화가를 꿈 꿨고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1930년대 각각 제국미술학교, 도쿄문화학원에서 야수파, 추상, 초현실주의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세례를 받았다. 해방 이후엔 한국 화단을 이끌어가는 중추가 됐다.
이중섭은 1956년 만 40세로 요절했다. 그리고 신화가 됐다. 김병기는 생의 절정기에 한국을 떠나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나 지금 여전히 살아있으며 만 100세의 현역 작가로 신작 개인전을 여는 놀라운 일을 벌이고 있다. ‘∼전해라’ 유행을 낳은 가수 이애란의 ‘백세 인생’에 담긴 장수 로망을 넘어서는 장수 만만세다.
죽어서 신화가 된 이중섭
이중섭은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무연고자로 처리된 그의 주검을 찾아내 예술인장(葬)을 주선한 이가 김병기였다. 장례식 날,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렀을 것이다. 소학교 시절 이중섭은 김병기의 집에 놀러와 자주 그림을 그렸다. 평양 갑부 집안 김병기의 집에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젤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군수를 지냈고, 아버지는 일본 유학파 서양화가 3호 김찬영(1889∼1960)이다.
도쿄 유학시절엔 훤칠하게 생긴 이중섭이 미대생 파티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대동강아∼ 대동강아∼.” 애국심을 자극하는 그런 가사를, 조선말로 호기롭게 불러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도 떠올랐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뛰쳐나올 듯한 격정적인 붓질의 ‘소’로 기억되는 이중섭. 작품보다 삶이 더 극적이다. 평온했던 유년 시절과 달리 성장해서는 가난과 투병생활, 가족과의 별리, 죽어서 더 인정받는 천재성, 그리고 요절…. 평론가 최열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황폐한 시절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순결한 영혼이었고, 이중섭은 폭발하는 천재이자 맑은 영혼의 모습으로 부활했다”고 말했다. 이중섭은 그렇게 죽어서 신화가 됐다.
살아서 신화를 쓰는 김병기
김병기는 한 때 한국 화단에서 ‘증발’한 작가였다. 그래서 대중적 인지도가 낮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 화가로, 서울대 강사로, 비평가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잘 나가던 그였다.
1965년이 변곡점이 됐다.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갔던 그는 귀국하지 않고 미국 뉴욕주의 시골 사라토가에 남는다. 49세의 간단치 않은 나이. 오로지 작가로 살고 싶어 잠행을 결정했던 것이다. 20년 잊혀졌던 그를 한국 미술계에 소환한 이는 윤범모 가천대 교수다. 뉴욕에서 우연히 소식을 전해 듣고 국내 전시를 주선했다. 1986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수차례 국내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해 초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갖기도 했다. 고국을 그리고 싶은 그는 1년 전 일시 귀국했다.
그는 지금도 무엇을 그릴까, 어떻게 그릴까를 고민하는 현역 작가다. 취미로 그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조형세계를 고민하며 변신을 추구한다. 그래서 살아서 스스로 신화를 써나가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형상과 비형상이 공존하며, 이분법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1990년대에 그린 그림만 해도 형상성이 강했다. 한국에 와서 그린 그림에서는 생략과 단순화가 보다 과감해진다. 면보다는 서예를 연상시키는, 일획이 긋는 힘이 화면을 장악하는 요소가 됐다. 반추상이면서 민중미술만큼이나 현실에 대해 발언한다. 북한의 핵실험, 메르스 사태 등 현실의 사건이 추상적 화면의 배후에 있다.
100세 장수 비결? 그것이 알고 싶다
여전히 정력적이다. 수 시간을 얘기해도 지칠 줄을 모른다. 젊은이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 그림이 잘 되지 않는 날에는 새벽까지 그린다. 도대체 건강 비결이 뭘까. 부정적인 생각을 오래 두지 않고 그걸 곧 긍정적인 쪽으로 바꾼다는 답이 돌아왔다. “몸이 아픈데 곧 죽으려나?”라는 생각이 들면 이내 지워버린다고 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동양인이라고는 중국식당 요리사 말고는 없던 사라토가의 시골 마을에서 수십 년을 고독 속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했다.
건강비결을 한 번 더 물었다. 씩 웃더니 그가 말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부자 되게 해주세요, 건강 주세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런 기도는 수억 명이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바빠요, 비슷한 건 다 못 들어 주세요. 그래서 기도문을 바꿔요. ‘비록 늙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좀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나님이 그 순간, 힘도 주고, 재능도 주지요. 나를 위해 일할 때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는 저도 몰래 힘이 나지요.”
나이? 그에게 나이는 뭘까.
“육십, 시작이지요. 칠십은 정말 시작이지요. 팔십쯤 되면 세상을 좀 알게 됩니다. 백세요? 그건 그냥 샘샘이지. 허허.”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김병기와 이중섭, 두 친구 이야기
입력 2016-04-03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