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들시대 ‘그레이의 후예들’ 급성장… 美 도서시장의 연애소설 열풍

입력 2016-04-02 04:02
온라인에서 판매 중인 미국 연애소설 ‘네이비실이 구하다(Saved by a Seal)’와 ‘불과 얼음(Fire & Ice)’의 표지. 아마존닷컴

“이번엔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지시에 따라 라이방 선글라스를 낀 근육질의 남자가 카메라를 응시했다. 헬기 조종사복을 입은 가슴 앞섶은 풀어 헤쳐 있었다. 카키색 옷자락 아래로 이두박근이 꿈틀거렸다. 남자가 맡은 임무는 운명의 여성을 추락 사고에서 구조해내는 야성적인 헬기 조종사 역이었다. 오래전 만난 적이 있는 둘은 곧 열정적인 사랑에 빠질 터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이 촬영은 다름 아닌 새 연애소설(Romance Novels)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아시아 여성들이 로맨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열광하고 있는 것과 달리 미국에서는 요즘 여성들이 연애소설에 푹 빠져 있다. 특히 전자책(e북)의 성장에 힘입어 일반인 출신 신인 연애소설 작가들까지 가세하면서 연애소설은 전에 없었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급속도로 성장한 시장 덕에 표지를 장식할 ‘육체파’ 모델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11년에 나온 연애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미국 도서시장을 휩쓴 뒤 2013년까지 연애소설 시장은 연애소설작가협회(RWA) 추산 10억800만 달러(약 1조1600억원) 규모로 급팽창했다. 특히 일반인도 별도 인쇄비용 없이 발행할 수 있는 전자책 부문에서 ‘작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장은 더욱 커졌다. 현재 연애소설의 40%가량은 전자책으로만 나오고 있다.

연애소설 확대는 전자책을 읽기 편하게 해주는 ‘킨들’ 등 태블릿 기기가 대중화된 영향도 컸다. 게다가 인터넷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이들 도서의 가격은 1달러(약 1100원)에 불과하다.

연애소설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지난달 전자책 전용 서비스인 스크립드(Scribd)는 가격 정책까지 바꿨다. 스크립드는 이전까지 1개월에 10달러(1만1500원)를 내면 무제한 작품을 읽게 했으나 지금은 같은 가격에 작품 3권에 오디오북 1권으로 구독 가능 도서를 제한했다. 작품이 읽힐 때마다 회사가 작가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해야 하는데, 연애소설 열풍으로 저작권료가 급증해서다.

작품이 쏟아지면서 표지를 장식할 모델 수요도 크게 늘었다. 특히 가벼운 연애담을 좋아하는 여성 독자가 약 84%를 차지하는 시장 속성상 표지 모델은 대부분 근육질의 남성이다. 표지 모델 유무에 따라 도서 판매량이 4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NYT는 전했다.

유명 모델 한두 명이 대부분 표지를 장식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수요가 넘쳐 신인들도 각광받고 있다. 특히 익숙지 않은 새 얼굴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야 독자들이 온전히 새로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표지 모델의 인기는 스타급이다. 헝가리 현역 프로축구 선수인 한 남성 모델은 우연히 연애소설 ‘휘말린(Entangled)’ 시리즈의 표지로 자신의 옛 사진을 팔았다가 1년 뒤 미국에 초대돼 팬미팅을 갖기도 했다.

이 모델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날 둘러싼 여성팬 수십 명이 ‘데이먼(소설 주인공)이 왔어!’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어떤 팬은 감격해서 울기까지 했다”면서 “정말 희한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