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아 우르는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과 서쪽으로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합니다. 비옥한 땅인 메소포타미아에 자리한 최고의 국제도시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신상을 만드는 명장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신전 중심사회였기에 데라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풍요로움과 안전이 보장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떠납니다. ‘하란’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여기서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교차로’라는 의미답게 하란은 지중해와 티그리스강 중부를 이어주는 무역 중심지였습니다.
하란에서도 ‘난다’의 신상이 발굴되는 것을 보아 데라가 여기서도 할 일이 있었던 겁니다. 하란에서 데라가 죽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바라 본 ‘발릭강’은 그에게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두 번째 명령을 받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아 안전한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조카와 아내를 데리고 하란을 떠납니다. 인생의 기원, 삶의 본질과 목적론적인 이해 속에서 창조주를 찾고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고민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음성입니다. 하란을 떠나면 나그네가 되어 광야 길을 가야 합니다. 씨족사회 시대 고대 근동지방에서 나그네는 ‘범죄자’와 같은 위협요인으로 명예살인이 가능했습니다. 안전한 삶의 포기, 익숙한 것과의 결별만으로 그의 순종의 의미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목숨을 담보한 모험으로의 여행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첫 번째 시험지는 ‘떠남’입니다. 히브리어로 ‘레크 르카’라 하는데요. 공간적인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다’를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이 ‘새로운 삶, 예배자의 삶, 믿음의 조상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루는 삶’으로 그 명령어를 이해했는지 검색할 자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떠남’에는 공간 이동의 의미도 있지만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임을 아는 것이 일반입니다.
아브라함은 175년 동안 17개의 크고 작은 시험을 겪었습니다. 우르가 안전지대라면 하란은 중간지대입니다. 걷는 길마다 시험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루아침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지만 우리의 게으름을 정당화할 우산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나안’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지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가나안에도 기근이 있었기에 버티다 못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나안을 들어가야 할 ‘공간’이 아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는 ‘상태’로 보고 싶습니다. 축복지대로 읽지 않고 도전지대로 보고 싶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성서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젖과 꿀입니다.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가나안을 이해했기에 하란을 가나안으로 착각했습니다. 하란이 중간지대임을 잊고 축복지대로 이해했습니다. ‘큰 교회, 성공하는 목회’가 아닌 ‘어떤 교회’가 될 것인지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흥과 풍요가 가져온 ‘축복지대 하란’의 역습을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17번의 기회가 있었기에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 17번째라는 위기인식이 필요 합니다. 가나안도 축복지대가 아닌 중간지대로 봐야 할 이유입니다.
100년 동안 거룩한 한국교회 믿음의 아버지들은 가셨습니다. 이성봉, 한경직, 옥한흠, 하용조 목사님들이 그립습니다. 기실 그분들께는 교회의 사유화, 권위적인 리더십, 돈이 힘이 되는 세속적 가치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들어가지 않을 자유를 누리며 광야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 교회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가나안에서 나와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광야는 목사와 교회가 극소화되고 하나님만이 극대화 절대화 되는 자리입니다. 지구촌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그분이 임재 하는 자리만이 안전지대입니다.
안성우 목사 <일산 로고스교회>
[기고] 한국교회, 가나안에 대한 ‘착각’
입력 2016-04-01 2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