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제2의 허사비스’, ‘제2의 잡스’가 나올 수 있을까.
지난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 대결이 큰 관심을 끌자 그 직후 정부는 5년간 1조원을 투자해 ‘제2의 허사비스’를 육성하겠다고 했다. 데미스 허사비스는 구글 딥마인드 CEO로 알파고를 개발해 ‘알파고의 아버지’로 불린다.
2010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애플의 아이폰이 전 세계적으로 스마트폰 돌풍을 일으키자 정부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키우겠다며 소프트웨어(SW)마에스트로 사업을 발표했다. 정보기술 개발자의 중요성은 이슈가 터질 때마다 부각됐다. 그리고 정부는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듯 개발자 육성 계획을 내놨다.
스펙 쌓기용?
업계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단시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급하게 개발자를 키우려다 보니 하향 평준화된 그저 그런 개발자들만 양산했다는 것이다.
미국 중국 등 AI 선진국은 십수 년 전부터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자를 키우는 등 AI 성장에 힘썼다. 미래창조과학부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7일 지능정보기술 관련 기업인과 전문가 20여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데이터 분석 전문가, AI SW 개발자 등 새로운 수요 창출이 기대되는 분야의 전문 인력을 집중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보고했다. “2019∼2020년 AI 관련 대회에서 우승하고 분야 세계 1위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거창하게 발표했다.
5년 만에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정부의 자신감은 예전에도 있었다. 2006년 국책 대학인 한국폴리텍대학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마이크로소프트와 연계해 3년간 SW 개발자 1000명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3개월짜리 ‘닷넷 전문개발자 교육 과정’으로 교육비 80%는 국가가 지원했다.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3개월짜리 교육과정으로 얼마나 전문성을 키울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으로 봤다.
교육 프로그램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래부가 제출한 ‘최근 3년간 SW 마에스트로 사업 현황’ 자료를 보면 연간 55억원을 투자해 고급 창업형 교육을 통해 ‘한국형 스티브 잡스’를 만들겠다는 사업 취지와 달리 1기부터 4기까지 배출된 SW 마에스트로 381명 중 창업으로 이어진 것은 13.6%(52명)에 불과했다. 취업을 선택한 교육생은 창업자의 2배 이상인 108명이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전병헌 의원(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만들겠다며 시작한 SW 마에스트로 사업이 취업준비생들의 스펙 쌓기용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비슷한 수준의 개발자들이 인력 시장에 쏟아지면서 내부 경쟁만 치열해졌다. 이러다 보니 업계 사정은 더 안 좋아졌다. 금융권, 공공기관 등 원청업체의 하청을 받는 SI 업체들은 낙찰받기 위해 경쟁사보다 더 낮은 입찰가를 적어내야 했다. 원청기업들이 “너희 말고도 할 곳 많다”며 갑질 횡포를 부려도 감수해야 했다.
현실감 떨어지는 정책
최근 송언석 기획재정부 2차관은 세종시에 있는 국고보조금 통합관리 시스템 구축 사업단의 세종개발사무실을 찾았다. 국고보조금 통합관리 시스템은 국고보조금 개혁의 일환으로 내년 7월 개통을 목표로 구축 중이다. 정부는 이 사업을 위해 지난달 4개 중소 SI 업체로 구성된 컨소시엄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 컨소시엄은 2013년 개정된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덕을 봤다. 정부는 중소 SW 개발 업체를 돕겠다며 공공부문 정보화 사업에 대기업 참여를 사실상 전면 금지시켰다. 삼성 SDS나 LG CNS 등 대기업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나, 최근엔 중소 SI 업체들까지 나서서 대기업 참여를 주장하고 있다.
이유는 일부 ‘대형’ 중소기업들이 공공부문 사업을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고보조금 통합관리 시스템 구축에 참여한 컨소시엄의 2개 기업도 업계에선 ‘대형’ 중소기업으로 꼽히고 있다. 중견기업 지정을 유예받고 중소기업으로 분류된 곳이다.
한 중소 SI 업체 대표는 “예전에 대기업이 했을 땐 하청을 받아 우리 인력을 해당 프로젝트에 투입할 수는 있었다”며 “그런데 ‘대형’ 중소기업들이 대부분의 사업을 독식한 뒤로 우리 같은 소형 업체들은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업계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정책은 또 있다. SW 기술자 신고제다. 개발자의 보유 기술 역량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단을 만들자는 취지로 2008년 12월 도입됐다. 그러나 IT 노동조합에 따르면 정부에 신고하더라도 일반 전산 업무직의 경우 경력의 80%만 인정받고 있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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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허사비스’ 키운다? ‘제2 잡스’는 어디갔지… 소프트웨어 인재 육성책 이대로 좋은가
입력 2016-04-01 17:53 수정 2016-04-01 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