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육룡이 나르샤

입력 2016-03-31 17:28

얼마 전에 종영한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실린 가사 중 하나를 빌려온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 29년에 왕조의 창업과 조선 왕조가 오래가길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악장(樂章) 형식의 노래다. ‘여섯 용이 날다’라는 뜻의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 건국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로부터 세종의 아버지 태종까지의 업적과 사적을 정리하여 왕조 건립의 정당성을 높여 이른 말이다. 고려 말기 부패한 나라와 피폐한 백성들 속에서 개혁의 꿈을 가졌던 ‘여섯 용’을 중심으로 정치 혁명과 욕망 사이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목은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최영 같은 이가 내부적 개혁을 꿈꿨다면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같은 이들은 ‘역성혁명’을 통한 새로운 왕조의 창출을 시도한다. 50부작이 방영되는 동안 시청자들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등장인물들이 정치적 희생물이 되어 하나둘씩 죽어 간다는 것이다. 모두가 개혁을 꿈꾸고 더 좋은 세상을 바라는데 왜 서로를 죽이는 피바람이 그치지 않고, 백성들은 더 힘들어지는가? 이들은 모두 백성을 위한 좋은 나라를 꿈꾸면서 서로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절대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인간들이 가지는 욕망의 속성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벌레’라는 말이 있다. 극중 이방원의 정인이었던 ‘분이’는 이렇게 말한다. “방원아, 네 속에는 벌레가 있어. 벌레가 너를 삼키려 하면 뱉어내. 벌레야! 방원의 뱃속에서 나와!” 벌레가 자라 자신을 삼키는 순간 인간은 괴물로 변해 버린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힘써 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목회자마다 ‘세상’까지는 아니어도, ‘교계’를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만과 고집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4·13총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은 자신이 진정 백성을 위하고 정치를 통해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가겠다고 경쟁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단지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삼켜버린 욕망의 벌레인 것이다. 성경에도 욕망의 벌레가 자신을 삼켜버린 인물이 있다. 바로 가룟 유다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동안 수없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들었지만 정치 혁명에 대한 자신의 ‘옳음’을 버리지 못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혁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세상의 방법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나’의 힘으로 하지 않겠다는 ‘자기 부인’이다.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순종하는 것이다. 자신의 틀을 깨지 못하고 욕망의 벌레에 삼켜진 자는 배신자의 길을 걷는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듯 정치인들은 국민을 배신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총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정치 토론이나 논설 프로그램을 유심히 시청하는 이유이다. 요즘 정치는 ‘감동’이 없다. 감동이 없다는 것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치 평론가들이 예측하는 대로 정치 지도자들이 결정하고 움직인다.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비상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예측을 벗어난 감동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상식을 뛰어넘어 ‘내가 매일 죽는다!’라고 했던 기도가 요즘 아주 조금 이해되기 시작한다. ‘옳음’이 아닌 ‘옳음의 방식’을 내려놓겠다는 기도. 내 틀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잠재적 ‘가룟 유다’로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모두 알았으면 좋겠다.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