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선배와 통화를 하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운을 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우울해 하지 말고 그냥 잊어버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마음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걱정해봤자 손해니까 그러지 말라든가, 지나간 일들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든가. 하지만 몸의 문제는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통증이 늘 있음으로 비롯된 우울이나 근심은 병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건강이 안 좋아지거나 기운이 없어지는 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요. 이제부터는 장기적으로 몸의 상태가 더 좋아지거나 더 젊어지는 법은 없을 테니,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세요.’ 예전의 나라면, 돋보기 없이도 책을 읽을 수 있고, 격렬한 운동으로 생긴 근육통도 하룻밤 지나면 씻은 듯이 사라지던 때의 나라면, 위로랍시고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다른 동물보다 유독 사람에게 더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것은 비슷한 형태와 구조인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편과 고통은 언젠가 한 번쯤 나도 겪었던 것이고 혹은 앞으로 겪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고통과 불편은 사람에게 무슨 의미인가. 몸이 반드시 늙고 또 반드시 죽을 운명임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이제 피부세포 하나만으로 온전한 쥐 한 마리를 복제할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도 병든 내장기관이나 탄력을 잃은 피부 같은 것을 새로 장만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이미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좀 과감하게 나아가면 이런 가정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병들지 않는다. 사람이 늙지 않는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 그런 날이 온다면, 사람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몸은 어쩌면 연민을 모르는 몸일지도 모른다.
부희령(소설가)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고통을 모르는 몸
입력 2016-03-31 1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