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덕환 <7> 지하실 빌려 전자부품 조립 ‘장애인 공동체’ 세워

입력 2016-03-31 17:36
삼발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자부품 납품과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때의 정덕환 장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던 내가 응답받은 곳은 5명이 모여 사는 장애인공동체였다. 한 집사님의 소개로 찾아갔는데 정부의 보조금 없이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며 지내고 있었다. 너무나 불쌍해 집에 있던 먹을 것을 수시로 공급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며 전도도 했다. 자연히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언제까지 장애인이란 이유만으로 도움만 받고 살아갈 것인가. 장애인도 일을 해서 수익을 내는 장애인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자. 우리도 일할 수 있음을 사회에 보여주자.”

난 과감히 공장이 많이 밀집돼 있는 서울 구로구 독산동의 한 허름한 건물 지하실 한 칸을 얻었다. 이곳에 ‘에덴하우스’란 간판을 걸었다. 비록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장소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이곳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국, 에덴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서 장애인이 두 손만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전자부품 조립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의욕이 넘치는 투지는 일감을 찾으러 다니면서 여지없이 꺾였다. 하청을 주는 곳, 우리가 할 수 있을 정도의 일감이 있는 공장을 찾아 갔지만 모두 문전박대를 당했다. 장애인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불량품이 나오면 그 손해는 누가 감당하느냐고 고개를 저어버리는 통에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

어쩌다 나를 불쌍히 여겨 일을 맡겨주기도 했는데 이번엔 우리 장애인이 문제였다. 정상인이 할 수 있는 작업량의 30%도 못했고 또 인건비도 너무 낮아서 일만 하는 것이지 생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의 주특기는 지구력, 즉 끈기다. 이 끈기로 유도 국가대표선수를 했고 이 끈기로 고된 재활훈련을 이겨내 삼발이 오토바이라도 타고 있는 것이었다. 난 매일 눈만 뜨면 전자부품업체들을 찾아다니고 또 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한 전자업체가 일감과 가격을 넉넉히 맡겨주는 일이 일어났고 우리가 열심히 납기일에 맞춰 일을 해다 주자 더 많은 일감을 주었다. 우리는 장애인을 더 고용해야 했고 나중엔 30여명이 함께 일하는 에덴하우스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집에서 놀며 밥만 축낸다고 미움을 받던 장애인들이 이곳에 와서 봉급까지 받으며 지내니 부모들 입장에선 내가 보통 고마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 차례 위기가 닥쳤다. 우리가 임대한 건물주가 파산, 건물이 넘어가는 바람에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거리에 나앉은 것이다. 집달리들이 기계와 가재도구를 강제로 내놓아 원생 30여명이 길거리에 쭈그리고 있어야 했다. 사회에서 냉대와 멸시를 받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으려는데 거리로 내몰려 버린 것이다.

난 내가 살던 아파트를 담보로 1000만원을 대출받아 구로동 165㎡(50여평)의 월세 건물을 임차했다. 복층이라 내부를 개조해 기숙사와 예배실도 만들었다. 컴컴한 지하실만 있다가 나오니 직원들이 너무나 좋아했다. 궁전이 부럽지 않은 우리 집이었다.

우리의 장애인 작업공동체가 기독교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게 됐는데 전국에서 장애인들이 함께 지낼 수 없느냐고 문의가 빗발쳤다. 무작정 찾아오기도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장애인들이 일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공간도 없지만 일감도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난 에덴공동체 식구들에게 영적재활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확고한 신앙관을 심어주는 것을 1순위로 삼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