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낮게 울렸다. 남자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경찰이 쫓고 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떠들썩한 고향 마을잔치를 뒤로 하고 그는 차에 올랐다. 서두르면 고속도로를 타고 항저우만 과해대교를 건널 수 있을 테고, 경찰의 추적도 뿌리칠 수 있을지 몰랐다.
매연에 그을린 고향의 담벼락과 어릴 적 뛰놀던 펑화강을 지나 차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다리에 도착하자 일이 틀어진 걸 깨달았다. 지나려던 15번 출입구는 이미 경찰이 막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무테안경에 하얀 아르마니 코트, 회색빛 버튼다운 셔츠를 입은 남자의 차분한 모습은 경찰의 호들갑스러운 체포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중국 주식시장 폭락으로 세계경제가 뒤숭숭하던 지난해 11월 1일. 중국의 전설적 투자가 쉬샹(39·사진)은 부패혐의로 공안 당국에 긴급체포됐다. 할머니의 100세 생일잔치를 벌이기 위해 들른 고향, 저장성 동부 닝보(寧波)에서였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중국 경제의 전설에서 부패의 상징으로 몰락한 쉬샹의 일대기를 29일(현지시간) 다뤘다.
◇주식시장과 함께 탄생한 성공신화=공장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쉬샹은 가난한 마을의 공공주택에서 자랐다. 고교 1학년이던 1993년 중국에서는 처음 주식시장이 열렸다. 독학으로 주식이론을 공부한 그는 부모에게서 빌린 3만 위안(약 500만원)으로 투자를 시작했다.
2년 만인 19세에 쉬샹의 명성은 자자했다. 조직폭력배들이 그를 개인투자담당으로 쓰기 위해 세력다툼을 벌인다는 루머가 돌 정도였다. 2005년 그는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권력층과 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였다. 기회도 찾아왔다. 중국 정부는 이 해부터 헤지펀드 사업을 승인했다. 중국 최상위층이 주식시장에 적극 뛰어든 게 계기였다.
2009년 쉬샹은 ‘쩌시(澤熙)’ 투자회사를 창립한다. 마오쩌둥 전 주석과 청나라 강희제에서 한 글자씩을 딴 이름이었다. 2010년 10억 위안으로 첫 펀드상품을 내놓은 쩌시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이때부터 2015년까지 쩌시가 내놓은 상품의 수익률은 무려 3270%였다. 같은 기간 상하이 주식시장은 겨우 11.6% 커졌다. 그에게는 ‘중국의 칼 아이칸’ ‘전설의 쉬’ 등의 별명이 붙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쉬샹에게는 악소문도 뒤따랐다. 권력층 자녀 ‘태자당(太子黨)’의 돈을 주가조작으로 부풀리며 정부 협력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중국경제가 휘청거릴 때도 쩌시는 성공가도를 내달렸다. 지난해 초 쩌시의 한 상품의 수익률은 357%에 달했다. 나머지 상품도 최소 20%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정부가 주식시장 회복을 위해 구입한 주식은 묘하게 쩌시가 매매한 주식과 맞아떨어졌다.
경기가 급속도로 악화하면서 여론은 쉬샹에게 적대적으로 돌아갔다. 지난해 9월 그가 부패에 깊숙이 연관됐다는 인터넷 게시물이 화제를 낳았다. 결국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한 공안 당국은 쉬샹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가 돈을 벌어다준 권력층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버렸다. 쉬샹이 11월 당국에 체포된 뒤 쩌시는 산산조각이 났다.
현지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쉬샹을 대중의 분노를 희석시킬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투자가는 NYT에 “이미 부패는 상상을 넘어설 만치 만연해 있다”면서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부패 혐의로 잡아 가둘 수 있다”고 전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3270% 수익률’ 中 헤지펀드 제왕의 롤러코스터 인생
입력 2016-03-31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