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대망’은 처세서의 원조다. 일본의 전국시대가 배경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불세출 영웅들의 ‘삼색(三色) 인간경영술’은 곱씹는 맛이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 의외로 나를 매혹시킨 건 일본의 외국인 용인술과 세계화이다. 마침내 천하를 평정한 도쿠가와 막부는 전쟁이 아닌 무역을 통한 해외진출에 눈을 돌린다. 배가 난파해 일본에 온 외국인이 활용됐다. 일본이 거대한 선박을 제조하고 그 먼 멕시코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한 건 놀랍게도 17세기의 일이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이 표류해 와 14년을 살았다. 어떤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멜의 실패 사례는 외국인 용인술이 치자(治者)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웅변한다.
스페인 출신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취임한 지 3개월이 넘었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날, 그는 어떤 임무를 부여받았을까. 사상 첫 외국인 수장이라 궁금함이 크다. 취임 3개월에 즈음한 공식 기자간담회에서 이에 대한 질의가 있었다.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고, 한국 미술 시스템을 세계화하고, 동시대 문화를 위한 중심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한다.” 마리 관장은 앞서 발표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목표를 다시 언급했다. 그러면서 “바로 이 세 가지다. 더는 없다”고 했다.
해외미술관 근무 경력이 있는 미술계 인사는 코웃음 쳤다. 말은 번지르르하다. 하지만 애매하고 구체성 없는 미션은 미션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한국 원로작가들의 해외 전시를 몇 건 성사시켜주시오’ 식의 구체적 주문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그건 십수 년 전부터 표현만 바꿔서 내려온 국립현대미술관의 목표”라며 “일본 역시 일본 미술의 세계화가 목표 아니겠느냐”고 했다.
발표한 4대 중점과제와 세부내용 역시 새로운 게 없다. 전시 수를 줄이고 전시의 우수성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과천·서울·덕수궁·청주 등 4곳으로 분산된 미술관을 연계해 하나의 미술관으로 운영한다는 것 등은 마리 관장이 오기 전부터 얘기돼 왔다. 그 역시 “새롭게 발명하거나 창출한 것은 없다.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우선순위를 정한 것”이라고 했다.
마리 관장은 직전 직장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관장직에서 검열 논란 때문에 불명예 퇴진했다. 그러더라도 네덜란드, 대만, 독일 등 여러 국제무대에서 일한 경험이 적지 않다.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모든 직원이 행복한 직장을 만들고 싶다”는 대답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세계화, 위상 강화를 위한 해외 세일즈이다. 동네에서 전시하면 동네작가, 세계에서 전시하면 세계적 작가의 등식이 성립하는 시대다.
문체부가 내린 미션은 정말 실망스럽다. 애매모호함은 치자의 역량 부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갖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수장을 영입한 이유가 서울대도, 홍대도 안 되니 그래서 스페인 출신이어서는 곤란하다. 문제는 또 있다. ‘미술계의 히딩크’가 되기 위해선 책임도 분명히 제시해야 하지만 권한 역시 확실해야 한다. 문체부는 지난해 관장 공석 중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규정을 어물쩍 고쳤다. 지금 관장은 인사위원회에도, 작품수집심의위원회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마리 관장은 취임 3개월 공식 기자회견 일정을 예고해놓고도 사전에 여러 매체에 개별 인터뷰를 쏟아냈다. 준비 덜 된 상태에서 이미지 홍보에 진력하기보다 빼앗긴 관장 권한 찾기에 더 신경을 써야 했었다. 그래야 ‘마리 브랜드’가 나온다. 손영옥 문화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내일을 열며-손영옥] 미술계의 하멜이 우려된다
입력 2016-03-30 17:40 수정 2016-03-30 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