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죄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백, 수천장의 반성문을 매일매일 썼을 겁니다.”
29일 서울동부지법에서는 촉탁살인(죽음을 결심한 피해자의 요구에 따라 그 사람을 죽이는 일) 혐의를 받는 피고인 오모(38)씨의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오씨는 A4용지 5장가량의 반성문을 읽어 내려갔다.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법정은 어느새 눈물바다가 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5시간 동안 오씨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여자친구 이모(당시 39세)씨의 부탁을 받고 그녀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남은 건 회한과 눈물뿐이었다. 지난해 12월 16일 밤, 오씨는 서울 강동구 자신의 고시원에서 이씨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줬다. 이혼 후 혼자 자녀 2명을 키우는 이씨는 생활고와 스트레스로 자주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오씨는 1시간 동안 이씨를 말렸으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이씨의 유서에는 ‘사기를 당해 순식간에 빚이 생겼다. 돈을 쓴 것도 아니고 저녁 굶으며 다녔는데 해결이 안 됐다. 내가 사라져야 악순환이 끊어진다. 정신분열증으로 아이들에게 미친 엄마 모습을 보여주긴 죽는 것보다 괴롭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씨를 살해한 오씨는 이후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주변 공중전화로 119에 전화해 “내가 사람을 죽였으니 집에 가 보라”고 신고한 뒤 근처 빌딩 옥상에 올라가 수차례 투신하려 했다. 그러나 16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오씨는 “한 발자국 더 내딛을 용기가 안 났다”고 말했다. 망설였던 오씨는 다시 투신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다 주변을 수색 중이던 경찰에 체포됐다.
검찰은 오씨에게 촉탁살인 혐의를 적용해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촉탁살인은 살인보다 형이 가볍다. 검찰도 오씨의 사연을 안타까워했다. 담당 검사는 “연인이었던 피해자가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순간적인 판단 실수로 피고인이 이 자리까지 왔다”며 “피고인의 안타까운 사정은 고려하되 절대 피고인에 대한 동정에 치우쳐선 안 된다”고 배심원들에게 당부했다.
붙잡힌 이후 식사도 거의 하지 않은 채 삶을 포기하려던 오씨는 담당 검사의 말에 마음을 잡았다고 했다. 그는 “검사님이 저한테 ‘이렇게 밥도 안 먹고 아무것도 안 할 거면 차라리 형량 세게 받아서 정신 차릴 때까지 감옥에 있든지, 아니면 빨리 정신 차려서 죗값 받고 남겨진 아이들 인생 뒤에서라도 도와줘라. 그게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그 말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재판은 배심원 평결 등을 거쳐 오후 9시30분쯤 끝났다. 법정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으나, 법은 엄정했다. 배심원 7명은 만장일치로 유죄를 내렸다. 동부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 이동욱)는 오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촉탁이 있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점, 적극적인 만류나 설득이 없었던 점, 남겨진 두 자녀의 상실감과 고통 등을 고려했다”며 “피고인이 자발적으로 신고한 후 일관되게 자백하고 있는 점 등도 참작했다”고 선고이유를 밝혔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법정이 눈물바다 그래도 법은 냉철했다… 생활고 연인 부탁에 ‘촉탁살인’ 30대, 가슴 저린 반성문
입력 2016-03-31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