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세원] 봄날, 헛걸음

입력 2016-03-29 17:57

시니컬한 봄바람이 차가워 아직 봄다운 봄을 느끼기는 이르지만 따스한 햇살이 좋아 남산 둘레길 산책에 나섰으나 주말인지라 사람들이 많아 조용한 주택가로 내려가 골목길 산보에 나섰다. 오래된 흔적을 지우지 않고 지켜낸 골목길은 도심 속에 정겨운 공간이라고나 할까.

거미줄처럼 연결된 골목길의 매력이라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다음 길에서는 무엇을 만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치 삼천포로 빠지는 것처럼 무언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에 테이블 하나가 거리로 나와 있는 오픈 카페가 있고 오르막·내리막길에, 막다른 길 같은 곳에서 길이 나타나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막다른 길을 만나고 차 한 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길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니 끝까지 가봐야 다음 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 낯선 골목길을 걷는 묘미다.

어느 길로 가겠다는 목적도 없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햇살이 따스한 한적한 골목길을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걷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덩달아 바뀐다. 외관이 눈길을 끄는 집이 나타나면 저 안에는 누가 살까 궁금해 하며 봄 햇살을 길동무 삼는다. 밤이라면 낯선 길을 혼자 걷기 두렵겠지만 담 너머로 봄꽃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봄날 낮의 골목은 조용하고 정겹기만 하다.

모든 것을 한번에 보여주지도, 드러내지도 않는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리치며 뛰놀던 유년이 세월의 두께를 입고 길 사이사이에서 살아난다. 굳이 눈감지 않아도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은 온기로 피어오르며 콘크리트 담벼락 밑에 피어난 봄 풀꽃조차 잊고 지낸 청초했던 시간과 연결되니 그리움과 닿아 있는 골목길에서 과거와 현재가 함께한다.

‘우연한 산보’의 저자 구스미 마사유키는 산책을 우아한 헛걸음이라고 했다. 도심 주택가 골목길을 아무 생각 없이 여유롭게 헛걸음하며 한낮을 보냈다. 봄꽃이 왕성한 어느 날 어느 길에서 아무 생각 없이 헛걸음을 걸으며 봄 속에 푹 빠져볼까.

김세원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