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결혼 전에 배운 양재기술로 삯바느질을 했지만 나는 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냥 밥만 축내며 지낸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일부러 휠체어를 타고 무작정 밖을 쏘다녔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자신에게 뭘 달라고 할까봐 기겁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척추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배들이 유도 연습하는 연세대 도장을 찾아 지도해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후배들이 좋아해 두 달간 신나서 매일 나갔는데 어느 날, 행정적인 문제가 있으니 이제 그만 나와 달라고 공식 통보를 받았다.
연세대 캠퍼스 백양로를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데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를 한 대 사서 수입상품을 떼어다 파는 일에 도전했다. 수입이 꽤 괜찮아 제대로 해보려고 했더니 이번엔 정상인이 그 일을 가져가 버렸다.
나는 분노하면서 이제 교회도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부터 냈다. 나는 교인이라고 해도 다듬어지지 못한, 하나님을 바로 만나지 못한 엉터리 신앙인이었다.
“여보.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나랑 기도원에 함께 가서 하나님을 만나요. 저도 이젠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요.”
아내와 나는 천마산기도원을 찾았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내가 주님을 만나야 한다며 준비기도를 일주일간 했고 신앙이 뜨겁던 누님도 내게 10만원을 보내주며 꼭 은혜를 받고 오라고 하셨다. 천마산기도원의 예배모습은 내게 이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성령으로 충만해 기도하는 모습과 방언을 하거나 병이 보는 데서 낫는 것 등은 내겐 신세계였다. 이천석 목사님이 방언을 받고 싶은 사람은 오후 3시에 오라고 해서 찾아갔다.
목사님이 한 사람씩 안수기도를 해주는데 다른 사람은 바로 방언을 하는데 난 방언이 나오지 않았다. 더 기도하라고 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내게 오더니 나를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자며 기도해 주기 시작했다. 얼마를 기도했을까 드디어 내 입에서도 방언이 터지며 회개의 눈물과 감사의 기쁨의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난 몇 시간은 기도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를 얼싸안고 기도해준 이는 남자고등학생이었다.
“오신 날 휠체어를 타고 계셔서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방언을 원하시는데 못 받고 계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제가 기도했어요.”
이 학생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때 맞춰 보내주신 것이 분명했다. 난 이날부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아내는 “당신을 위해 6년이나 눈물로 기도해 왔다”며 “드디어 당신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아내도 이번에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기도의 문이 열려 새로운 영적세계를 체험하게 되었다. 부부가 큰 은혜를 얻고 기도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니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강한 시험이 다가왔다. 은혜 뒤엔 시험이 온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먼저 아내와 충돌하고 언쟁이 잦았다. 아내만 보면 화를 냈다. 아내도 참다가 한 번 화를 냈는데 난 아예 가출을 해 버렸다. 내가 더 잘못하고 집까지 나오자 처가에서도 화가 났고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이혼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영적으로 더 성숙한 아내였다. 아내의 인내와 기도가 자칫 가정이 깨어질 위기를 넘기게 만든 것이다. 연단을 잘 이겨낸 우리 부부는 1979년 서울 구로동 이화아파트란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동네 입구에 ‘이화식품’이란 구멍가게를 냈다. 가게를 지키며 물건만 팔면 되니 내게 가장 적합한 일이었던 것이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정덕환 <5> 장애인의 현실적 어려움 탓 아내와 잦은 언쟁
입력 2016-03-29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