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논현로 시스플래닛 사무실. 발달장애인 3명이 아트디렉터들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들은 미술 등 특정 부분에서 우수한 능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소유자다. 선과 점으로 세밀하게 작업하는 이인석(24)씨가 눈에 띄었다.
이씨는 놀이동산 지도를 보면서 1㎝ 이하의 작은 부분도 자 없이 반듯하게 그렸다. 무엇을 그렸는지 물었더니 이씨는 “에버랜드에 있는 ‘T익스프레스’(롤러코스터)에요”라고 짧게 답한 뒤 환하게 웃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다.
이씨는 3년째 이곳에서 매주 2시간씩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그린다. 밀알복지재단은 2014년부터 KB국민카드의 지원으로 미술에 재능을 지닌 발달장애 청소년을 모집해 ‘봄 프로젝트’ 전문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봄 프로젝트’에 선발돼 그림 작업을 꾸준히 한 이씨는 최근 서울 밀알미술관에서 세 번째 전시회도 열었다.
처음부터 이씨를 지도해온 아트디렉터 김윤우(30)씨는 “인석이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부터 집중을 잘했다”며 “선과 점으로 음영과 원근을 표현하는 기법을 그림에 적용하더니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씨가 평소 좋아하는 주제와 이에 맞는 재료 등을 선정한 뒤 지도한다. 선과 점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씨가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보통 6∼8개월이 걸린다.
이씨를 비롯한 발달장애인들은 매주 수업을 하기 전 아트디렉터들과 함께 기도한다. 김씨는 “인석이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마음껏 펼치며 세상에서도 빛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그림은 이씨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희망’의 도구다. 가족과 여행했던 장소와 이씨가 좋아하는 사물 등이 그림의 단골 소재다. 이씨가 유난히 좋아하는 ‘지하철’도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이씨는 다양한 지하철의 모양을 쉽게 구별한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지하철 노선도를 외운다. 이씨는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심장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회복됐지만 아들의 심장에만 관심을 갖던 부모는 또래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 했다. 이씨가 네 살이던 1996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말을 안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병원에 데리고 갔다. 이씨는 발달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 기은숙(51·남서울은혜교회)씨는 “그동안 아들의 잠재성을 몰랐는데 우연한 기회를 통해 알게 돼 감사하다”며 “발달장애인은 일반인보다 이해도가 떨어지고 소통하는 게 어렵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에 대해선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들은 그림 그릴 때 너무 행복해한다”며 “밀알학교 중·고등학생 시절 합주단에서 비올라를 배울 땐 힘들어했는데 미술은 적성에 맞는지 힘들다는 소리 한 번 안했다”고 귀띔했다.
기씨는 그동안의 세월이 쉽지 않았는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기씨는 밀알학교 졸업생들의 어머니 모임에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위로를 얻는다. 아들을 품고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기씨는 “인석이가 그림으로 인정받고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져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현재로선 아무런 욕심이 없다”며 “단지 모든 장애아들이 장애의 편견을 넘어 가능성 있는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느리지만 아름답게, 희망을 그려요… 화가의 꿈 키우는 발달장애인 이인석씨
입력 2016-03-28 17:32 수정 2016-03-28 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