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준동] 알파고가 내준 復棋

입력 2016-03-28 17:36

근황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도 그랬다. ‘생각은 언제나 답을 찾는다’는 무심(無心)의 경지에 빠져 있었던 이세돌 9단. 그가 이제는 또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다. ‘실패를 바로 볼 수 있어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복기(復棋)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공식 인터뷰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바둑에 대한 아주 원론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고 했다. “인류가 진 게 아니라 내가 진 것”이라며 고개를 숙였던 ‘입신(入神)’의 통렬한 자기반성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그의 복기는 인생 전체를 향하고 있을 듯하다.

인류와 기계 대표의 일전 후 전 세계는 인공지능의 경이로운 발전 속도에 공포와 전율을 느꼈다. ‘으스스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러면서 ‘인류’ ‘인간다움’에 대해 얘기했다. 인간의 영역은 어디까지이고 인간의 가치는 또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모든 운명은 인간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결론도 도출했다. 미래를 향한 심층적이고 장기적인 복기였다.

그럼 우리 사회의 복기는 제대로 되고 있는 걸까. 이벤트 후 두려움도 있었지만 왜 우리는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하사비스 같은 혁신가가 나올 수 없는 건가라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 각계의 참회록도 이어졌다. 자연히 틀에 박힌 교육 시스템,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연구문화, 거대한 취업 공장화되고 있는 대학 교육부터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까지 눈이 돌려졌다.

그래서인지 교육부가 인문학 진흥을 위해 올해부터 16개 대학에 1년간 450억원, 최대 3년간 135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정부의 첫 대학 인문역량 강화 사업이다. 갈수록 위축되는 인문학을 보호·육성하고 인문계열 학생들의 낮은 취업률을 높이자는 취지다. 핵심은 기존의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을 사회 수요가 많은 학과와 융·복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설 자리가 없는 인문학은 더욱 주변화되고 취업교육화될 가능성이 높다. 근시안적이고 단기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꼴이다. 인문학(humanities)은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인간다움’이라는 뜻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주목받는 건 바로 이 ‘인간다움’이다. 이세돌-알파고 승부에서 이런 사실이 여실히 입증되지 않았던가.

정부 정책이 얼마나 단기성과에 집착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5년 동안 인공지능 분야에 1조원을 투자해 제4차 산업혁명의 마중물로 삼겠다고 했다. “조기에 성과를 내도록 뒷받침하겠다”는 사족까지 달았다. 예산을 지원한 뒤 ‘숙제 검사’ 하듯 해마다 일정 성과를 독려하겠다는 얘기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분야에서 코미디 같은 접근이다.

돈줄을 쥔 관료들이 연구를 좌지우지하고 계량적 단기 평가에 치중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알파고’도 ‘하사비스’도 나올 수 없다. 서울대 등 국내 5개 대학 연구부총장들도 이런 취지의 공동선언문을 정부에 전달했다. 서울대 공대는 백서를 통해 “교수들이 단기간 성과를 강요받다 보니 홈런(탁월한 연구성과)보다는 번트를 대더라도 꾸준히 1루에 진출(단기성과)하는 데 만족했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당장의 긴급함에만 몰리는 것은 시간을 파괴한다. 장기적 관점이라는 시간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 위에다 소멸되어가는 인간적·윤리적 가치를 재생해야 한다.” 유네스코 미래전망 사무국장이자 세계적인 지성 제롬 뱅데의 말이다. 알파고가 내준 복기의 해답이다. 김준동 사회2부장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