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장터 ‘늘장’ 개발에 떠밀려 ‘난장’ 되다

입력 2016-03-28 04:02
2013년 서울 마포구 경의선 철도유휴부지에 문을 연 ‘늘장’은 개발계획에 따라 지난 연말 문을 닫았다.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은 26일 ‘난장’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장터를 열었다. 장터 입구에 입점한 가게 이름을 적은 푯말이 서 있다(왼쪽 사진). 난장을 찾은 아이들이 장터 바닥에 노란색 물감으로 ‘HOPE(희망)’라고 쓰고 있다.
본디 철길이었다. 2005년 경의선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철길 따라 자투리땅이 생겼다. 26일 찾아간 서울 마포구 공덕역 주변도 그랬다. 한동안 공터였던 곳에 ‘플리마켓(벼룩시장)’이 들어선 건 2013년이었다. 중고 옷가지를 파는 곳이 생겼고, 그림책 도서관이 들어섰고, 연기를 배울 수도 있었다. 공덕역 주변 장터는 지난해 6월 경의선 숲길과 이어지면서 찾아오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사람들은 철길 공터를 ‘늘 열려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늘장’이라고 불렀다.

‘늘장’은 왜 ‘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을까

26일 늘장 주변은 어수선했다. 바로 앞에서는 주상복합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타워크레인과 포크레인이 분주했다. 늘장은 이날 이름을 ‘난장’으로 바꿔달았다. 쫓겨나는 김에 난장판이나 벌여보자고 ‘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정은 이렇다. 늘장협동조합은 지난해 10월 마포구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개발 계획에 따라 늘장을 폐쇄하라는 요구였다. 입점 매장은 하나 둘 떠났고 비어버린 늘장에는 목조 가건물만 남아 겨울을 났다. 문화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을 꾸렸다. 경의선 지하화로 생긴 땅을 시민이 찾고 즐길 수 있는 공유지로 남기자고 주장했다. 일단 늘장부터 다시 살리기로 했다. 이날 장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팔아볼까 해서 나왔어요.” 김지선(38·여)씨는 이날 작아져 못 입는 옷을 들고 난장을 찾았다. 간판도, 흔한 호객 행위도 없지만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옷은 비싸봐야 3000원이다. 밑지는 장사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어차피 못 입는 옷이라며 웃었다.

염리동 주민 이승수(33)씨는 두 살배기 아들에게 줄 그림책 2권을 샀다. 난장을 찾은 이들은 피아노를 쳤고,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강아지도 장터를 거닐었다. ‘버스킹 공연(길거리 공연)’도 열렸다.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 선거유세원도 명함을 건네느라 바빴다.

공유지의 가능성

이원재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공동대표는 “독점하려 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난장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경의선 용산∼가좌 구간(6.3㎞) 철도유휴부지는 공공 공간이자 생태축으로 시민의 자산이다. 공덕역뿐만 아니라 홍대입구역 등 폐선부지에서 벌어지는 대기업 주도의 개발을 손놓고 볼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도심 속 한 뼘의 공유 공간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위태롭기만 하다. 개발은 합법적이다. 마포구는 “철도시설공단이 관리하는 국유지를 임시사용 허가받아 늘장협동조합에 운영을 위탁했던 것뿐”이라면서 “원상복구 요구에는 변함없다”고 했다. 철도시설공단 관계자는 “철도유휴부지를 임대해 수익을 내고 다시 철도에 투자하는 게 공단의 업무”라고 답했다.

모두가 난장을 반기지는 않는다. 주변 아파트 주민 강모(40)씨는 “공사가 끊이지 않아 소란스러운데 어차피 개발된다면 빨리 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난장 자리에는 20층 주상복합빌딩이 들어설 계획이다.

26일 서울여중 1학년 같은 반 친구인 최서영 이준희 엄지연 이선우양은 난장을 찾았다. 첫 수행평가를 하기 위해서다. 신문을 만들기로 했는데 주제는 ‘우리 동네 자랑거리’라고 했다.

박승배 도시연대 사무처장은 “토지의 소유권뿐만 아니라 공유 공간에 대한 권리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이 주체적으로 도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사회적 고민과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글·사진=신훈 기자 zorb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