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혁상] 그들의 국민은 어디 있나

입력 2016-03-27 18:11

어김없이 선량(選良)을 뽑는 해가 돌아왔다. 4년 만이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올해 유권자들이 유독 많이 듣는 단어가 있다. ‘국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이고 여당, 야당 의원들 할 것 없이 모두 ‘국민을 위한 정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최근 연일 이어지는 정치권발(發) 소식을 보면 그런 구호는 허울뿐인 표현에 불과하다.

9개월 전인 지난해 6월 25일로 돌아가 보자.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유달리 비장하고 격정적인 목소리를 냈다.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여당 원내대표를 겨냥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고 한 것이다. “앞으로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국민이 직접 나서달라고 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이른바 ‘총선심판론’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여야 정치권을 겨냥해 “당리당략에 매몰돼 있다” “본인들만을 위한 정치” “자기 정치”라고 거듭 비판하는 것도 그 대전제는 정치권이 국민과 민생을 외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진실된 사람이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배신의 정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엄중한 심판론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충정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후폭풍은 그와는 달랐다. 지난해 가을부터 여당에서 점화된 이른바 ‘대구 현역의원 물갈이론’에 이어 이번 공천과정에서 그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여당의 코미디는 박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가 배경이 됐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다. 박 대통령식 ‘국민의 정치’가 수개월 뒤 오히려 계파 편 가르기와 정치보복 논란을 촉발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유승민 의원은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면서 그도 ‘국민’을 언급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어떤 권력도 국민을 이길 수 없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치러진 총선에서 특정인물 한 사람의 공천 여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론의 주목을 받아 생중계 대상이 되고, 또 여당 대표가 이런 공천 의결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과연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들 모두 이런 상황에서 ‘국민’을 거론했다. 총선을 불과 보름여 앞둔 지금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의 후폭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타협’이 이뤄졌다고 자평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정치권의 이전투구 속에서 ‘국민’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이 나서서 심판해 달라”고 했지만 국민 심판 이전에 이미 박 대통령 자신이 심판해버렸다. ‘국민’을 외쳐왔던 여당, 야당은 물론 의원 개개인까지도 실제로는 극단적인 계파 갈등과 정치적 흥정, 몰아세우기, 계파 패권주의 속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이다. 국민이라는 단어를 너무 자주, 가볍게 다룸으로써 듣는 이들 조차도 감흥이 없어져 버렸다.

여야 할 것 없이 공천 과정에서 드러낸 정치권 다툼은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대의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나선 후보의 공천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국민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최고의 후보를 선택하는 게 아니고, 여러 잔의 독배(毒杯)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도는 상황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를 상징하는 이 문구는 신성하다. 더 이상 ‘국민’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의 사탕발림이 돼선 안 된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